간접 경험의 즐거움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비극은 대물림된다 '열두 번째 용의자'

새 날 2019. 10. 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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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는 1953년 늦가을, 겨울의 문턱으로 곧 들어설 듯 연일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서울 명동에 위치한 ‘오리엔타르 다방’에는 문인과 화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김기채(김상경)가 다방에 들어선 것은 이즈음이다. 


누군가가 백두환 시인의 살인 사건을 언급했고, 다방에 앉아있던 이들 역시 한결같이 귀를 쫑긋 세운 채 그 비극적인 사건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김기채가 나섰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군인이라 밝히고, 오리엔타르 다방 안에 있던 이들 모두를 용의자로 특정, 백두환 시인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무척 신중하게 접근하는 듯하던 김기채. 백 시인이 숨지던 당일 알리바이를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이후 그가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육군 특무부대’ 소속 상사임이 밝혀지면서 태도가 돌변, 가뜩이나 긴장감이 감돌던 다방 안은 분위기가 일순간 가라앉는데... 



영화 <열두 번째 용의자>는 한국전쟁이 막 종식된 어수선한 시절, 한 시인의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용의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어설프게 봉합됐던 우리의 아픈 역사적 실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시대극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됐던 1953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해로, 일제강점기의 친일 잔재와 6.25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혼재해 있는 무척 어수선한 시기였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해체되면서 우리 사회는 친일 매국 행위로 떵떵거리며 살아온 친일세력들에 대한 처벌과 단죄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런 와중에 두 이념으로 갈라진 동족 간에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고, 한국전쟁은 3년 뒤 종식됐음에도 이후로는 또 다시 사상 문제가 부각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이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목숨을 잃어야 했다.   



영화는 오리엔타르 다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김기채가 이곳에 머무르던 이들을 대상으로 백 시인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추적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해당 사건과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배경에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가 자리하고 있고, 그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면서 심리 추리극으로 시작된 영화는 어느덧 시대극으로의 장르적 변화를 꾀하게 된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머릿속에 그리며 추리의 재미에 푹 빠져들었을 관객들이 혼란을 겪을 법한 지점이다. 제목을 통해 짐작되는 것처럼 단순히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생각하고 이 영화를 관람하게 될 경우 어느 순간부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만큼 겉과 속의 결이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한 시인의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추리극을 생각하고 왔다가 뜻밖에도 광기 가득한 ‘애국주의’를 보게 되는 격이다. 



애국주의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활용되는지, 아울러 지금도 사회 일각에서 그 쓰임새가 뚜렷한 ‘빨갱이’라는 용어가 어떤 방식으로 가공되고 악용되는지, 오리엔타르 다방 안에 있던 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을 통해 끔찍하고도 적나라한 방식으로 시연된다. 경찰이 아닌 군인이 나서서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파헤치는 상황은 비극을 잉태시키는 요소다. 한정된 공간에 몰아넣어진 용의자들은 공포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몰아붙이는 김기채는 광기에 의해 이성을 잃고 만다. 



감독은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과거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 우리의 발목을 어떻게 잡고 있으며, 어떠한 쓰임새로 특정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지를 추리극의 형식을 빌려 관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광기와 함께 대물림되고 있음을 영화 <열두 번째 용의자>는 극명히 보여준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는 실로 크다. 뒤틀린 애국주의와 빨갱이의 광기는 지금도 주변을 서성거리며 우리 스스로를 좀먹고 있다.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감독  고명성  


* 이미지 출처 :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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