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왜, 반말하세요?

새 날 2019. 4. 15. 18:59
반응형

언제 어느 곳을 가든 사람이 모이면 대뜸 묻는 말이 있다. 나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단 두 사람만 모여도 서로 나이를 확인하게 되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서열이 정해진다. 장소며 모임의 성격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나이, 졸업년도, 입학년도, 직업, 직위 따위를 어떻게든 알아낸 뒤 위아래를 가르고, 한쪽은 존댓말을 다른 한쪽은 반말을 하게 된다.

끈끈한 유대감과 전우애로 유명한 해병대 전우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고작 예닐곱 살에 불과한 어린 아이들까지 모이기만 하면 기수나 나이에 따라 자동적으로 서열이 정해지곤 한다.



윗사람을 공경하는 장유유서의 유교문화가 여전히 살아있고, ‘한 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임을 강조하거나, ‘서열이 있어야 질서가 잡힌다’는 등의 전통 아닌 전통을 아직도 공공연하게 받아들이고 고수하는 대한민국 사회. 지난 14일 방송한 SBS <SBS 스페셜> ‘왜, 반말하세요?’ 편에서는 탈도 많고 말도 많은 대한민국 사회의 서열 문화를 조명했다.

“김치찌개 나오셨습니다” 우리식 서열문화의 폐해

수학 교사이자 방송반 지도 교사인 모 고등학교의 이윤승 선생님은 학생들과 반말로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이윤승’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사용한다. 우리에겐 낯선 풍경이다. 이윤승 선생님은 “학교에 처음 들어와서 학생들과 상담하는데 약간의 벽이 느껴졌다. 더 소통하고 싶은데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내가 더 권위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권력들을 다 내려놓고 싶어’ 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럴 때 제일 좋은 건 ‘반말해도 괜찮다’였다”고 말한다.



방송반은 전통적으로 위계질서와 군기문화가 강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고민했다는 선생님은 결국 솔직한 소통을 위해 학생들에게 반말을 권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서로 존댓말을 하면서도 그런 거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서로 하고 싶은 말 할 수 있는 관계가 되면 또 서로 그냥 자기가 편한 말을 한다. 결국 말은 시작이고 마지막에는 관계가 핵심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학생들이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말고 꼭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귀띔한다. 덕분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학생들이 늘어나 반갑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형성된 위계질서가 흔들릴까봐 불만을 제기하는 선생님들도 계셔서 요즘에는 고민이 늘었다고 한다.



한편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에서 시동생을 향해 이름 ‘호원’으로 호칭하여 장안의 화제가 됐던 발칙한(?) 며느리 김진영씨는 “저는 시동생을 예뻐했는데 결혼하고 호칭 문제가 불거지면서 서먹해졌다. 그러면서 대화를 안 하게 되고 가족들의 존중 따위의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관계를 해치고 있고 본질과도 멀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비대칭적인 시댁의 호칭 문화에 불만을 제기했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당시 불편과 부당함을 호소하는 며느리 김진영씨에게 제시된 해법은 무조건 ‘참으라’는 것이었다. 시댁과 친정 식구들을 부르는 호칭은 복잡다단하다. 그 호칭들 간에는 엄연히 위아래 질서가 존재하고 그에 따라 존댓말과 반말의 사용 여부도 달라진다. 그나마 근래 가족 호칭에 대한 불만이 공론화되고 있고, 그에 따라 개선책이 마련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대목이다.

그렇다면 유독 나이를 따지고 서열을 중시하는 우리식 문화를 외국인들은 과연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한국인 여성과 가정을 꾸려 1년 6개월째 거주 중인 영국 남성 단 브라이트씨는 과도한 존댓말의 폐해로 일선 식당에서 경험한 ‘김치찌개 나오셨습니다’는 예를 들었다. 음식을 주문한 주체를 높이다보니 사물인 김치찌개까지 덩달아 높여 부르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꼬집은 것이다.


한국사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독일인 라헬씨는 “동갑이면 친구가 되는 것부터 충격적이다. 왜냐면 친구라는 개념이 무언가 친하고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그런 개념인데 ‘너네는 동갑이니까 친구야’라고 하는 것부터 처음에 혼란이 왔다”고 말한다. 우리말을 쓰면서 윗사람에게 반대의사를 표현하기가 힘들었던 점은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불만 가운데 하나다.



나이 묻기와 서열의식은 일제의 잔재

한편 단 한 살이라도 많고 적음을 헤아려 위아래를 굳이 나누려는 우리말 속 서열의식은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비롯됐을까? 서울교대 오성철 교수는 “학교에서의 상급생이 하급생에 대한 통제, 통제와 지배의 그 관행 역시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그런 관행이 형성되었고 그게 해방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의 유교 탓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교육제도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초대 문부대신으로 모리 아리노리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일본 근대교육을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충성을 다하는 신민을 기르기 위한 장치로 완전히 재편을 한다. 일본의 사범학교를 군대식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상급생의 명령, 교사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이른바 ‘사범형 인간’으로 길러진 셈”이라고 말하며, “반장제도 역시 민주적인 제도로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데 군대 내 하사관 제도가 일본 근대교육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학교 안에 도입된 것이다. 학생을 통해서 간접통치를 하는 체제, 그러니까 학교의 반장과 군대 내의 내무반장이 대단히 유사하다”고 덧붙였다.



알고 보니 학교의 많은 시스템이 일제 강점기 모리 아리노리가 만든 군대식 학교제도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우리가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나이 묻기와 서열의식이 애초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해방된 지 70년이나 지났는데, 왜 우리는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서열에 목을 메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해 오성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책임을 식민 시기의 유산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어쩐지 그 원인의 절반만을 설명하는 것 같다. 75년도에 학도호국단이 부활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즉 1968년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고 이를 중심으로 학교교육이 재편된다. 그 과정에서 일제 강점기 때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관행, 규율 이런 것들이 전면적으로 부활했다고 생각한다. ‘황국의 신민’을 길러내기 위한 장치가 ‘대한민국 국민’을 길러내기 위한 장치로 ‘효율적이다’ 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방송에 따르면 4.19혁명 이후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조금씩 느슨해져가던 학교 안의 권위주의는 1968년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면서 다시 일제 강점기 사범학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애국조회와 제식훈련, 반장제도, 그리고 선도부 활동 등을 학교에서 경험하며 자란 우리는 학년, 나이, 직급이 높은 사람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권위주의에 어느덧 익숙해진 것이다.



사람과 사람 가깝게 잇는 대안 마련돼야

한편 우리와는 달리 1960년대까지 권위적인 사회였던 독일이 수평적으로 사회문화를 만든 데엔 특별한 역사적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라헬은 “독일 현대사에서 20세기의 가장 큰 분수령은 68세대 학생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육청이나 교육직에 있는 분들이 대부분 나치 정권에 참여한 분들이 그대로 주요 직위에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기존의 권위주의 또는 남자를 우대하는 사회에 대한 반발로 권위를 가진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에게 반말을 해도 된다고 자유롭게 해준 그런 부분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역시 제도를 바꾸고 권리를 지키려는 시민 스스로의 지난한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일상을 깊숙이 파고든 권위주의만큼은 깊이 고민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게 아닐까 하는 점은 반성해야 하는 대목이다. 오성철 교수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관행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발전해야 된다고 믿고 있다. 이런 것들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해서 그런 것들을 왜 해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의심 없이 유지해왔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송에서는 직업이 바뀌자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과 말의 높이가 순식간에 낮아졌으며, 낮아진 말 높이는 여지없이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사례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높낮이가 확연히 다른 언어는 위아래로 서열을 나눠 수직적 관계를 형성하고, 반대로 수평적 언어의 사용은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여 복종이 아닌 질문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는 “높이든 낮추든 상관없다. 말의 높이를 하나로 통일하면 된다. 만나서 제발 나이를 묻지 말자. 나이를 확인하지 말자. 가능한 나이를 서로 모른 척하고 무조건 타인으로서 서로 존중하자”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파고든 권위주의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만나면 무조건 나이부터 물으며 서열을 따지는 문화는 지양하고, 조건을 떠나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하는 문화로 탈바꿈시켜야 하지 않을까?

“서로를 존중하는 존댓말, 서로를 가까이 이어주는 반말, 우리말의 좋은 점을 살리면서 사람과 사람을 서로 가깝게 만들고, 더 좋은 결과를 위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더 나은 대안, 지금부터라도 함께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 이미지 출처 : SBS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