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서울 골목길의 친일 항일 흔적

새 날 2019. 3. 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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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자락에 위치한 '한국통감관저'. 이곳은 제3대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매국노 이완용이 한일병합에 서명했던, 우리에게는 더없이 수치스러운 장소다. 현재 한국통감관저 건물은 없고, 터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 일본군 위안부를 위로하는 ‘기억의 터’로 조성돼 있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한국통감관저 터부터 조선총독부가 설치돼 있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그리고 조선신궁 터까지 총 1.7km에 이르는 구간은 지난해 '국치길'이라는 이름의 역사탐방로로 새롭게 조성됐다. ‘국치길’이라는 명칭은 국권 상실의 현장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동안 그저 스쳐 지나온 서울 골목길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친일과 항일의 역사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독립선언과 임시정부 100년, 지난 2일 방송된 SBS <뉴스토리> ‘서울 골목길에서 만나는 3.1절’ 편에서는 우리가 평소 자주 지나다니던 곳이면서도 잘 알지 못했던 서울 골목길에 얽힌 친일과 항일 역사의 흔적을 돌아봤다. 


서울 경복궁역을 빠져나와 주택가 골목길로 들어서면 서촌이 나온다. 서촌이란 명칭은 원래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마을을 일컬은 데서 유래한다.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에 위치해있는 동네다. 서촌은 근래 북촌과 함께 덩달아 인기가 치솟고 있다. 한옥마을로 관심이 부쩍 높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에도 친일과 항일의 흔적은 깃들어있다.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9가길7-9 ‘윤덕영가옥’ 이곳은 권세가의 집으로 짐작될 만큼 웅장하다. 윤덕영은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합에 앞장서온 대표적인 친일파다. 그가 조성한 아방궁이 바로 서촌에 위치해있다. 일반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돌계단 등은 윤덕영의 가옥이 예사 한옥이 아님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방송에 따르면 윤덕영이 나라를 팔아먹고 일왕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서촌에 조성한 가옥 부지는 벽수산장, 99칸 한옥 등 모두 2만 평에 달한다고 한다. 이곳을 굳이 아방궁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윤덕영은 일왕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1910년대부터 땅을 사들이기 시작하여 옥인동 전체의 54%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게 된단다. 이곳 주변에는 을사오적 가운데 하나인 이완용의 땅도 위치해있다. 


서울 종로구 옥인1길34 ‘박노수미술관’ 이곳은 윤덕영의 아방궁 가운데 딸이 살았던 집으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송에 따르면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이 집은 해방 이후 한국화의 전통을 이은 남정 박노수 화백이 살다가 지난 2011년 작품 50점, 유품 50점과 함께 모두 사회에 환원됐다고 한다. 부끄럽기 짝이 없던 친일 매국의 유산이 새로운 가치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가까운 곳에는 박노수 화백의 스승인 청전 이상범의 가옥(서울 종로구 필운대로31-7)도 위치해있다. 



한편,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 독립운동 테마역으로 지정돼 새롭개 조성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서울시는 상해임시정부의 문을 형상화한 ‘백년하늘문’ 등 독립운동 테마역 조성사업을 오는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일에 맞춰 모두 끝낼 예정이라고 한다. 


안국역은 3.1운동의 중심지다. 인사동길에는 이완용의 집터이자 매국노들의 모의처로 활용됐던 장소 등 친일의 흔적뿐 아니라 3.1운동과 독립선언 유적지 같은 다양한 항일의 흔적들이 산재해있다. 골목길 곳곳에 숨어있는 이들의 흔적을 찾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곧장 북촌 방향으로 올라가면 서울중앙고등학교가 나온다. 학교 안에는 작은 한옥 한 채가 놓여있다. '삼일당'이다. 1919년 당시 중앙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숙직실로 사용됐던 시설인데, 이곳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학생독립선언서 발표에 앞서 3.1운동이 모의됐던 장소이기도 하다.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오면 인사동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곳 골목길 안쪽 깊숙이 위치한 '숭동교회'는 3.1운동에 앞장섰던 학생들의 비밀 집회 장소였으며, 수송공원 자리에 위치해있던 '보성사'는 독립선언서 3만5천 부를 인쇄했던 천도교 계열의 인쇄소였다. 



방송에 따르면 3.1운동 하루 전인 2월 28일, 밤늦게까지 돌아가는 인쇄기 소리를 이상하게 느낀 조선인 일본 경찰 신승희가 보성사로 들이닥쳤다고 한다. 보성사 사장이 33인 대표 손병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 원에 달하는 당시 돈 5천 원으로 이를 무마시켰단다. 자칫 3.1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순간이었다. 3.1운동 이후 일본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신승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3.1운동 하루 전 세브란스병원에서 한 미국인 아기가 태어났다. 이 병실에는 간호사가 감춰둔 독립선언서가 있었다. 아기 아빠가 우연히 이를 발견하게 되고, 덕분에 독립선언서 원문과 3.1만세운동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서울 종로구 사직로2길17 ‘딜쿠샤’ 사직터널 위 언덕길, 오래된 서양식 2층 붉은 벽돌집이 유독 눈에 띈다. 3.1운동을 최초로 보도한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가족이 살던 곳이다. 그는 광산업자이면서 UP통신 통신원이었다. 방송에 따르면 신혼 초인 1923년 직접 이 집을 짓고 딜쿠샤라는 이름까지 붙였다고 한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미일관계가 악화되자 테일러 가족은 1942년 강제 추방된다. 그는 광복이 되고 다시 돌아오려 했으나, 1948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게 된다. 방송에 따르면 딜쿠샤의 소유권은 국가로 넘어갔고, 관리가 전혀 안 되는 바람에 한때 무허가 17가구가 살며 귀신 나오는 집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던 2005년 3.1절 바로 전날 태어난 아들이 한국 측에 영화 제작 가능성을 물어오면서 묻혔던 딜쿠샤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딜쿠샤는 2017년 8월 등록문화재로 지정, 내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29 ‘경교장’ 이곳은 광복 이후 환국한 김구의 거처이자 임시정부 요인들의 집무공간이었다. 마지막 임시정부 건물인 동시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최초의 국내 정부청사였던 셈이다. 외양은 서양식이었지만 건물 안쪽은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다. 방송에 따르면 금광으로 돈을 번 친일파 최창학이 환국한 임시정부 공간으로 이를 내놓았다고 한다. 1949년 김구가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피격된 곳도 다름 아닌 이곳 경교장이었다. 경교장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은 2013년의 일이다.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119 ‘윤동주문학관’ 인왕산 자락길 동쪽 끝에는 아담하고 예쁜 흰색의 건물 한 채가 세워져 있다. 윤동주문학관이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하숙집과 가까워 자주 올랐다고 하는 ‘시인의 동산’이 바로 문학관 지척에 위치해있다. 문학관은 고지대 수돗물 사정이 개선되면서 필요 없게 된 상수도가압시설을 활용, 지난 2012년 우물을 형상화해 꾸며졌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의 탄압에 온몸으로 저항하지 못한 창백한 지식인의 모습을 못내 부끄러워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수감돼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동안 무수히 왕래하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서울 골목길, 알고 보니 곳곳이 항일과 친일의 흔적 등 역사의 자취로 가득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다. 치욕의 현장 한국통감관저 터에 적혀있던 아래의 문구를 상기하면서 우리 주변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 이미지 출처 : POOQ(푹)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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