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치란 말야

인공지능기술이 극한직업 배우에 미치는 영향

새 날 2018. 4. 18. 21:31
반응형

2007년에 개봉한 영화 '300'은 매우 스펙터클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군인이 무려 100만 명에 이르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려진 제작 후일담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 그 멋진 장면 하나하나가 실은 전량 스튜디오 내부에서 촬영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물을 제외한 배경 영상은 죄다 CG로 작업된 결과물인 셈이다.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을 소개한 모 TV 프로그램에서는 배우들이 스튜디오 내부 푸른색 스크린 앞에서 매우 진지한 연기를 펼치던 장면을 전파로 내보낸 바 있다. 실제로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신은 수많은 적들을 향해 칼을 들고 높이 솟구치는 장면이었는데, 이의 촬영은 스튜디오 내부, 그것도 아무런 지형지물조차 없는 온통 푸른색으로 칠해진 벽 앞에서 배우 혼자 허공을 향해 원맨쇼를 펼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이런 방식으로 촬영된 원본 필름에 배경을 입히는 작업이 추가로 진행되면서 비로소 완성작에 조금씩 다가서기 시작하는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CG 기술이 발전하였다고 해도 이는 생각보다 꽤나 고된 작업이다. 촬영이 끝나면 필름 원본에서 사람과 사물을 별도로 분리해야 하고, 여기에 CG를 활용, 새로운 배경을 입히는 까다롭고 지난한 작업이 진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 혁신이 거듭되면서 CG 역시 급속도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원본 필름과 CG의 결합은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일일이 거쳐야 하는 힘겨운 작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시간과 인력, 그리고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멋진 CG로 덧입혀져 탄생한 영화 '300'은 비로소 관객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영화는 CG와 관련하여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될 만큼 CG의 비중과 완성도가 매우 높다. 물론 근래 영화를 포함, TV와 광고 등 각종 미디어 매체에서 CG가 시각화 작업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축으로 이미 자리잡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 장르에서 CG의 역할과 비중이 높아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라는 직업인들의 직무는 왠지 더욱 어려워지고 심지어 극한으로까지 치닫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CG가 실사로 구현하기 어려운 시각적 특수 효과를 대신해주면서 배우들의 연기는 되레 힘들어지는 모양새다.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 '300'의 사례만 보더라도 그렇다. 


배우들은 현장에서 직접 몸을 부딪히고 동료 배우들을 상대하면서 연기하기보다 언젠가부터 푸른색 일색의 벽 앞에 서서 나홀로 연기를 펼쳐 보이는 경우가 더 잦은 느낌이다. CG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이런 현상은 그에 비례해 점증하고 있는 모양새다. 배우는 어떤 경우에도 극의 상황에 걸맞은 감정을 이끌어내야 하고 이를 밖으로 표출해야 하는데, 그냥 벽만 멀뚱히 바라보면서, 혹은 허공을 향해, 이를 요령껏 소화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때문에 극한 직업으로 내몰렸다는 표현은 결코 과하지 않다.


영화속 실재 공간이 아닌 갑갑한 스튜디오 내부 푸른색 스크린 앞에서 다양한 종류의 감정을 어색함 없이 그럴 듯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건 제아무리 연기의 신이라 해도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닐 것이라 짐작된다. 배우가 제대로 된 연기를 선보이려면 몰입이라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작금의 환경에서 과연 감정 이입과 이의 표출이 과연 가당키나 한가 모르겠다. 갈수록 배우들의 자괴감만 커져가는 건 아닐는지.. 



바야흐로 4차산업혁명이 도래하고 있다. CG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AI 기술이 CG는 물론, 영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근 사람 대신 AI가 이미지 학습을 통해 스스로 CG 작업을 하는 기술인 어레이(Arraiy)가 주목 받고 있다고 한다. 이 시스템을 활용할 경우 화면에 포함된 노이즈를 스스로 제거하고, 실시간으로 시각 효과를 입힐 수 있게 된단다. 지금의 제작 방식과는 달리 촬영과 동시에 사물의 움직임과 형태, 그리고 조명 효과 등 모든 요소를 실시간으로 반영, 시각 효과를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꽤나 획기적이다. 사람들의 일손을 덜어줌과 동시에 제작 시간 또한 크게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배우들에게는 어떤 영향이 미칠까? 그동안 배경이나 기타 요소를 CG로 채워넣기 위해 푸른색 스크린 앞에서 배우들이 억지 감정을 짜내며 갖은 노력 끝에 혼신의 연기력을 펼쳐야 했는데, 어레이로 대변되는 AI가 영상 작업에 본격 활용된다면, CG 때문에 굳이 이런 방식의 촬영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지금과는 달리 편집이 얼마든 쉽게 가능해질 테니 말이다. 이 기술은 광고업계에서 가장 먼저 활용되고 있으며, 외연을 점차 넓혀가고 있는 와중이다. 지난 해 영국의 시각 효과 스튜디오 '더밀'이 어레이의 기술을 도입하여 특수효과가 가미된 광고 영상을 선보인 것이다. 최근엔 우리 돈으로 100억 원에 달하는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다고 한다.


여타의 산업을 통해 이미 예측되는 바와 같이 AI가 영화에서 활약하기 시작하면 영화 제작 과정이 훨씬 효율화되면서 감독이나 제작자가 그들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거나 재량권의 기회가 많아질 것으로 점쳐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대되는 건, 그동안 CG 기술의 발전이 아이러니하게도 배우의 직무를 극한 직업으로 내몬 경향이 없지 않았는데, 이 현상을 인공지능기술로 과연 얼마나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는 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