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시민 눈높이에 맞춘 행정, 아주 칭찬해

새 날 2017. 11. 1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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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18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복지박람회 개막식의 특별 연설을 위해 단상 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새벽까지 애써 준비한 연설을 생략한 채 단상에서 곧 내려오고 만다. "시민이 추울까 봐"가 그 이유였다. 박 시장은 애초 20분으로 예정된 시민보고 연설을 위해 이날 새벽까지 직접 원고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토록 정성을 기울였건만, 추위에 떠는 시민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연설 대신 다음의 짧은 멘트만을 남긴 채 단상에서 내려온 것이다. 


"오늘은 시민들을 추위에서 해방시키는 게 가장 큰 복지인 것 같아요. 제 연설은 생략하고, 앞으로 시민 여러분들과 함께 서울을 위대한 복지도시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권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지극히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기에 행사에 참석한 시민들의 환호와 박수가 쇄도했던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물이다. 비록 작은 배려였을지 모르지만, 지자체장의 신분으로서 박 시장이 몸소 보여준 이러한 행동은 시민들을 흐뭇하게 하고, 차갑게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마저 따스하게 녹인다. 



문득 어릴적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초중고 시절 학교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들을 운동장에 한데 모아놓고 이른바 애국조회라는 것을 했던 기억이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든, 살을 에이는 추위가 들이닥치든,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기 위해 우리는 꼼짝없이 운동장에 서 있어야만 했다. 


게다가 훈시는 왜 그리도 길었던지 이 때문에 월요일 아침이면 늘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물론 일선 학교 입장에서는 교육 목적상 혹은 행정 목적상 이와 같은 행사가 필요악이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당시 일선 교육 현장의 눈높이는 아이들을 향하기보다 오로지 교사들의 권위, 특히 그 가운데서도 교장의 권위를 가장 소중하게 떠받들고, 교육 행정 역시 그에 초점을 맞춰 운영돼왔던 것 같다. 


ⓒ뉴스1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정치인이나 행정 관료들이 그 자리를 빌려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워온 사례를 우리는 그동안 숱하게 봐 왔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시민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의 치적을 늘어놓는 일에 모든 정력을 쏟아부어온 경향이 크다. 이른바 서민 코스프레 행세를 하면서 사진 한 장만을 달랑 남기고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판국에 눈높이를 시민에게 최대한 맞춘 박 시장의 이날 행동은 그 어떤 좋은 정책보다 칭찬 받아 마땅하다. 


지난 15일, 전국은 지난 해에 이어 또 다시 지진 공포로 떨어야 했다. 포항 지진 이후 정부는 불과 하루 앞으로 다가온 대학수학능력평가를 1주일 뒤로 전격 연기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초유의 사태 앞에서 국민들 대다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해 하는 눈치였다. 일정 수준의 혼란은 불가피해 보였다. 줄줄이 예정돼 있던 대입 전형을 비롯, 각종 일정이 모두 틀어지게 됐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이번 결정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 실로 간만에 보는,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춘 조치였기 때문이다. 수능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지만 아이들의 안전보다 소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울러 지진의 직접적인 피해로 인해 물리적 심리적 타격이 불가피한 해당 지역 학생들과 기타 지역의 일반 학생들 사이의 형평성을 고려한 바람직한 조치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 일변도에서 아이들에게 어떡하든 훌륭한 성적을 거두는 일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기도 해 내심 흡족하다. 


시민이 추울까 봐 밤새 준비한 연설문을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지극히 인간적인 따스한 면모, 아울러 학생들의 안전과 형평성을 고려하고 보다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상식적인 조치, 이렇듯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춘 행정이 곧 복지라는 마인드를 갖춘 지자체장이 존재하고, 정부가 시민을 향해 조금씩 다가서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이상 우리 사회는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바다. 


그들을 아주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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