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차라리 수학여행을 없애자

새 날 2016. 10. 29. 23:26
반응형

현대인들에게 있어 여행은 보편화된 활동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당시만 해도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먹고 살기 바쁘고, 지금처럼 대중교통이 발달하거나 집집마다 승용차를 보유하지 못했기에 여행은 일종의 사치재의 영역에 속했다. 이렇듯 경제적인 여건이 녹록지 않던 시절에는 학교를 통해 단체로 이뤄지는 수학여행이 제법 의미있게 다가온다. 단체로 상품을 구입하는 까닭에 비교적 저렴한 경비로 평소 선망해 오던 지역을 다녀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련한 추억거리를 남길 수 있었던 건 덤이다.


이 수학여행의 의미가 근래 많이 퇴색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행이 보편화되면서부터인데, 실은 교육 당국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웬만한 가정마다 승용차 한 대 이상을 갖추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풍요로운 시대를 우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수학여행이 학생 수준에 결코 걸맞지 않은, 지나치게 호화스러운 경로와 비용으로 짜여지거나 상이한 가격대의 상품으로 기획, 이를 취사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이마저도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하는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올 1학기 수학여행 내지 체험학습을 떠난 중고등학교 학생 1인당 수학여행경비 최고가가 무려 230만원에 달한단다. 한 고등학교가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수학여행은 태국, 베트남, 몽골, 중국, 인도네시아, 피지 등의 여행지를 7박8일간의 일정으로 계획하였는데, 여행지에 따라 1인당 소요 경비가 170만 원에서 230만 원까지로 격차를 보였다고 한다. 


사전적 의미의 수학여행이란 학생이 실제 경험을 통하여 지식을 넓힐 수 있도록 교사의 인솔 하에 이뤄지는 여행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교육적 효과를 노릴 수 있다. 가령 역사, 문화, 경제, 산업 등 교과서 속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주요 현장을 직접 견학함으로써 폭넓은 식견을 쌓거나 풍부한 정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집단 생활을 통해 학우들과의 추억거리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갈수록 고급화되는 수학여행의 변화는 교육 주체에게 있어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수학여행 한 번 보내는 데 200만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된다면, 이는 제아무리 교육적 효과가 뚜렷하다 해도 과도한 경비임이 분명하다. 형편이 어려워도 자식 기 죽일 수 없다며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이에 응하는 게 대부분의 학부모 심경인 실정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마지 못해 보내야 하는 자녀의 1인당 수학여행 경비로 기백만 원이나 소요되는 이 기가 막힌 현실 앞에서 어쩌면 요즘 청년 계층이 애를 낳지 않고 이를 회피하려 하는 마음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헤아리게 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요소들이 모이고 모여 작금의 '헬조선' 현상을 낳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앞서 언급한 일부 여행 대상 국가는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곳이라기보다 휴양지에 가까운 지역이거늘, 과연 이곳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기에 수학여행이라는 명분으로 굳이 그 비싼 돈 줘가며 가야 하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답답한 건 같은 학교에서 비용에 따라 수학여행지를 달리할 경우 형편이 안 돼 가고 싶은 곳을 선택하지 못하는 학생과 부모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이거늘, 학교 당국이 과연 이를 헤아리기나 한 것인지도 의문스럽기만 하다.


교육적 효과 및 취지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절차나 방식에 하자가 있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재고해 봐야 할 성질의 것이다. 아이들의 진로 탐색을 위해 교내에서 이뤄지는 직업 체험이 그 취지는 좋으나 운영 과정에서 학부모의 직업에 따라 자칫 아이들로 하여금 위화감을 조성케 하거나 차별화의 도구로 전락하곤 하듯이, 수학여행 또한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안겨줌은 물론, 여행지의 차이에 따르는 비용 격차로 인해 교육 주체들 사이에서 계층 간 위화감이 조성될 개연성이 다분하다.


사실 현대인들에게 있어 여행이란 20세기적 상황의 그것과는 천양지차다. 여건이 많이 좋아진 것만큼은 틀림없다. 일선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자꾸만 해외로 눈을 돌리는 이유 또한 이 지점에 있다. 그러나 수학여행이란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문화라기보다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대규모 행사인 까닭에 학생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과거 집단주의 문화의 흔적이 여전히 이에 배어 있다. 때문에 한결 자유롭고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근래의 분위기와는 전면 배치된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는 일본 학생들의 집체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일제의 잔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실은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문화일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는 안전 문제마저 부각된 터라 더욱 신경이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쯤되면 수학여행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존폐 여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면, 혹은 얻는 것에 비해 개인과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하는 대가와 부작용이 훨씬 크다면, 아울러 앞서 나열한 여러 문제점들을 양산할 바에야, 차라리 수학여행 자체를 없애는 게 훨씬 이롭지 않을까? 교육 당국은 이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