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당신의 일상은 안전한가 '터널'

새 날 2016. 8. 1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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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아이의 생일을 맞아 케이크를 준비한 채 얼마 후 가족과 진행할 행복한 생일잔치를 떠올리며 무척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귀가 중이던 모 자동차회사 딜러 이정수(하정우), 전화 통화를 하던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살짝 들떠 있는 느낌이었으며, 빠르게 달리던 그의 차량은 어느덧 하도터널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 때다. 꺼림직한 굉음은 터널 안쪽 어딘가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터널 천장을 향해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딱히 특이한 현상은 없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무언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주변 분위기였다. 반대편 차선뿐 아니라 자신이 달리고 있던 차선에서도 이정수의 차량 외에는 개미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은 한산했기 때문이다. 평소 지체 정체를 밥먹듯 해야 하는 우리의 도로 여건과 견주어볼 때 운전자에게 있어 이렇듯 한산한 상황은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달콤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되레 터널속 나홀로라는 묘한 상황과 함께 앞서 전해진 굉음이 그에 더해지며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상황이다. 



터널 중간을 지나 거의 3분의 2 지점에 다다랐을 즈음이다. 앞서 이정수의 귓속을 울리던 기이한 굉음은 앞으로 그가 맞닥뜨리게 될 최악의 운명에 대한 전조 증상 내지 신호음이었다. 그러니까 멀쩡하던 터널이 급작스레 무너지기 시작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엄청난 소음 및 먼지 폭풍과 함께 이정수의 차량은 부서진 터널 잔해 속으로 그대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차마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함 그 자체였다. 부서진 터널 잔해들 속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 그였기 때문이다. 이정수는 간신히 휴대전화를 이용, 119에 구조 요청을 하는데...


하도터널은 개통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매우 따끈따끈한 시설물이다. 물론 최근 지어진 구조물이다 보니 첨단 기법들이 총동원되었으리란 점은 누구든 짐작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고 그 결과가 발표되면서 우리가 짐작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만다. 이번 사고의 원인은 그동안 중요한 순간마다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아 온 부실공사의 전형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는 이정수 단 한 사람의 생존자만이 확인된 상황, 사고 수습과 그의 구출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세이프 코리아'를 지향하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러한 후진국형 사고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될 사안이다. 덕분에 사고 현장에는 대규모의 사고대책반이 꾸려지고 정부 주요 인사들도 시시때때로 이곳을 찾곤 한다. 주요 방송사나 언론 매체들의 취재 열기 또한 뜨겁다. 온 국민의 눈과 귀는 어느새 모두 이곳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부실공사 때문에 터널 자체가 처참하게 무너져내린 상황도 짐짓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이후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사건과 해프닝들은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고도 충분하다. 구조를 위해 입수된 터널의 설계도면은 실제 터널의 모습과는 딴판이었고, 이 때문에 이정수를 구조하기 위해 사활을 건 구조활동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만다. 촌각을 다퉈야 할 구조현장에서 어떻게 이렇듯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아연실색케 할 정도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이러한 사건들이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사고 대책반을 찾은 장관(김해숙)이란 사람은 흡사 누군가를 빼닮은, 예의 그 두루뭉술하면서도 초점 없는 얘기만을 늘어놓고 있는 데다 번역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할 법한 화법을 구사하며 주변 상황과 제대로 된 엇박자를 드러낸다. 기자들이라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생명과 관련하여 가장 윤리적으로 다뤄져야 할 명제는 아예 뒷전이고 오로지 선정성 내지 특종 경쟁에만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온통 비정상적이고 몰상식하며, 불합리함 일색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상식적이며 정상적인 사고체계를 지닌 사람이 우리 사회에 전혀 없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모 매체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믿을 만한 직업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얼마 전 벌인 적이 있는데 소방관이 1위로 떠올랐다고 한다.  



온통 가짜가 판을 치고 엉터리 투성이인 상황에서도 이 영화 속에서조차 군계일학과도 같이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인물은 다름아닌 소방관이란 직업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소방대장 김대경(오달수)은 형식에 치우치고 있는 정치인 내지 관료나, 사람의 생명보다 세인들의 흥미를 끌 만한 자극적인 사안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이른바 기레기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배두나는 이정수의 아내 역으로 등장한다. 애초 부실 투성이에다 설계도면까지 엉터리였던 까닭에 골든타임을 놓치고 구조마저 늦어지다 보니 남편의 생사 여부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다른 악재가 더해지게 되고, 악화된 여론은 이정수의 아내를 희생양으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남편의 재난 상황도 받아들이기 힘든 여건에서 어렵사리 이를 참고 견뎌오고 있었는데, 온통 모순 덩어리인 현상들이 이에 덧대어지며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뜨악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남편의 생사 여부를 알지 못 하는 곤혹스러운 현실과 여론에 떠밀린 채 어쩔 수 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 최악의 순간에도 남편 이정수를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아내로서의 곱디 고운 심성을 온전히 표현하던,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 바로 그녀였다. 



이 작품은 재난 장르의 영화로 분류되어 있으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류로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자연에 의해서든 아니면 다른 요소에 의해서든 무언가 대규모의 재난 상황이 벌어지고 이를 헤쳐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얼개를 생각한다면 크게 실망할 법하니 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비틀거나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무너진 터널 잔해물 속에 갇힌 채 생사를 넘나들듯 사투를 벌여 온 평범남 이정수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져나오는 걸죽한 욕지기나 어이없는 웃음 유발은 그의 한 사례로 꼽을 만하다.  


이야기는 가벼운 듯싶으나 작품 속에 담긴 주제 의식 그리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제법 묵직하다. 사람의 목숨을 놓고 숫자놀음을 벌이는 사람들, 며칠만 더 지난 뒤 구출되었더라면 기존의 기록을 깰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잔인한 속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기자들 아니 기레기들, 촌각을 다투는 사고 수습 및 생명 구조 현장에서 사진 등 흔적 남기기에만 열중하며 본질보다는 지극히 형식에 집착하는 정치인들과 정부 관계자들, 숫자에 얽매인 나머지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일부 구조대원들, 본질에 대해선 애써 생각 않은 채 오로지 현상에만 치중하며 부화뇌동하는 수많은 대중들, 이런 모순적인 환경에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과연 생명과 안전을 제대로 담보 받을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던진 과제는 실로 엄청나다. 그러나 이후에도 수많은 재난 상황을 경험해야 했던 우리는 여전히 변한 게 없다. 영화에서처럼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그리고 열심히 해결할 것이라는, 형식적인 대책들만 늘어놓는 지도자와 정치인, 그리고 관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과연 '세이프 코리아'란 구호가 정말로 실현 가능한 사안의 것인지, 이 영화는 진지하게 되묻는다. 


당신의 일상은 과연 안전한가? 



감독  김성훈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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