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욕망과 갈등의 마천루 '하이-라이즈'

새 날 2016. 3. 3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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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주변에 우뚝 세워진 '하이 라이즈'는 유명 건축가 로열(제레미 아이언스)에 의해 설계된 최첨단 주거공간이다. 주로 상류 계층만이 입주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나마도 층수에 따라 또 다시 계층이 나뉜다. 즉,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보다 고소득의 높은 지위에 속하는 계층이 자리를 잡고, 그 가운데에서도 맨 꼭대기인 40층 펜트하우스는 하이 라이즈를 설계한 건축가 로열이 거주하는, 완전히 독립된 데다 자급자족까지 가능한 별천지 세상이다. 신경외과 전문의인 닥터 랭(톰 히들스턴)도 이 건물 25층에 입주하게 된다.

 

분주한 입주 과정을 마친 랭이 모처럼 한가해진 틈을 이용, 베란다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찰나, 바로 위층에서 술을 마시던 샬롯 멜빌(시에나 밀러)이란 여성이 실수로 술잔을 랭 쪽으로 떨어뜨린다. 술잔이 산산조각 남과 동시에 랭의 평온한 일상은 흡사 그 깨어진 술잔처럼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상류층 사람들의 삶의 완성도를 높이고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해 줄 것만 같았던, 완벽에 가까운 멋진 공간 '하이 라이즈'라 불리는 또 다른 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치명적인 결함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상층과 하층의 생활은 불평등의 연속이다. 이로 인해 하층에 거주하는 이들의 불만은 점차 쌓여가고, 상층에 거주하는 이들 역시 그들 나름의 고통을 호소하며 아래층 입주민을 향해 하층민이라는, 여과되지 않은 표현마저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계층 간 갈등을 야기하는 불씨로 작용하게 되지만, 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곧이어 야기된 끔찍한 한 사건 때문이다. 랭의 동료 의사이자 하이 라이즈 37층이라는 상당히 상층부에 거주하던 먼로가 어느날 같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 라이즈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히 평온함 일색이다. 사람이 죽어나갔는데도 경찰차 한 대 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흡사 모든 일을 자체에서 해결 가능하기라도 한 듯싶다. 평소 상층부와의 갈등과 불평등 구조에 대해 가장 불만이 높았고, 이번 사망 사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던 하층민 와일더(루크 에반스)는 현직 방송국 직원이라는 그만의 특기를 살려 이를 파헤치겠노라며 다큐멘터리 제작에 직접 뛰어든다. 상하층 간의 갈등은 이를 계기로 본격 극단으로 치달아간다. 추락하는 새는 날개가 없는 법이다.

 

 

하이 라이즈라는 최첨단 건물이 의미하는 건 다름아닌 자본주의 체제다. 그 안에선 온갖 욕망과 갈등이 들끓는다. 자체 모순에 의하든, 아니면 하이 라이즈의 설계 당사자인 로열이 인정하고 있듯 애시당초 치명적인 결함을 지녔든, 어쨌거나 하이 라이즈가 그랬던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 역시 내부 갈등이 갈수록 첨예화된 채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아니 최악의 경우 하이 라이즈를 직접 설계하고 이를 조종하던 이가 사라진다 해도, 공고한 하이 라이즈 체제가 무너지거나 없어질 수 없듯, 자본주의 체제 역시 비록 내부적으로는 곪아터지고, 국가의 통제마저 벗어나 미친 질주를 지속한다 해도 여전히 건재하다. 

 

하이 라이즈의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량들과 나팔 바지 패션 그리고 콧수염을 멋드러지게 기른 당시의 유행으로 짐작컨대,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아마도 70년대일 것 같다. 혼성 그룹 아바가 부른 'SOS'를 오케스트라와 암울한 목소리의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 잇따라 들려주며 이번 작품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대목도 이채롭다.

 

 

하이 라이즈라는 시스템 속에서 잘 사는 방법을 직접 시연해 보인 닥터 랭, 갈등 인자이자 하층민의 대표격인 와일더가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 즉 세계 유일의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묵인과 절제 그리고 때로는 광기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그의 행동을 통해 직접 증명해 보이는 느낌이다. 그의 거주층인 25층 역시 그러한 랭의 성향을 상징하는 숫자가 아닐는지.

 

갈등이 고조되어가고, 그에 의해 하이 라이즈 체제 자체가 흔들리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은유와 풍자가 담긴 영상을 연속적으로 나열하여 선보이고 있으나, 흡사 랭이 사방팔방 거울로 이뤄진 엘리베이터에 갇혀 혼란스러움을 느껴야 했듯, 이는 되레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장치로 다가온다. 물론 애시당초 감독이 이러한 효과를 노렸음직하나, 때문에 이래저래 씁쓸하기도 하거니와 참 불편하고 불친절한 영화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감독  벤 웨틀리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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