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지독히도 치열한 사랑 '시간이탈자'

새 날 2016. 4. 16.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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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을 살아가는 지환(조정석) 그리고 2015년을 살아가는 건우(이진욱), 이 두 청년은 공교롭게도 신년맞이 행사가 벌어지던 같은 시각, 동일한 도심 한복판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몸에 치명상을 입어 사경을 헤맨다. 두 사람은 다행히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얼마뒤 깨어나지만, 이후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지환에게는 2015년을 살아가는 건우의 삶이 시시각각으로, 건우에게는 1983년을 살아가는 지환의 삶이 동시에 교차 투영되기 시작한다. 

 

강력반 형사인 건우, 어느날 그에게 과거의 미제 사건 기록이 넘어온다. 이를 들춰보던 중 지환과 결혼을 앞둔 윤정(임수정)의 피살 사건이 해당 기록에 남겨진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데, 동시에 지환에게도 이 모습이 여과 없이 고스란히 투영되면서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곧 닥쳐올 비극적인 사건을 사전에 막기 위해 지환은 윤정이 살해되는 날짜와 장소를 당시 신문기사로 확인하고 피의자를 수소문, 뒤를 쫓게 되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피살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다.

 

 

건우는 1980년대 지환의 삶이 왜 자신에게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지 여전히 의문 투성이인 상황에서 어느날 살해된 지환의 애인 윤정과 완전히 판박이인 여성을 발견하게 되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녀의 뒤를 쫓는데..

 

지환과 건우가 32년이라는 긴 시간을 훌쩍 넘어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건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들의 인연은, 윤정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라는 물리적 매개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그 실체를 확인시켜 주며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두 사람의 인연 한가운데엔 윤정의 비극적인 죽음과 윤정을 빼닮은 소은이 자리한다. 지환과 건우가 서로 상대방의 삶을 투영할 수 있게 된 건 지환과 윤정의 애틋한 사랑이 끔찍한 범죄로 인해 꽃을 피우지 못할 즈음이다. 즉, 내세를 굳게 믿던 윤정은 자신의 억울한 죽음으로 사랑의 인연이 지속되지 못하자 생전 소망 대로 소은의 몸을 빌려 스스로를 환생시키고, 지환과 건우의 삶마저 서로를 잇게 하고 있는 셈이다.

 

 

1983년의 시대적 배경은 80년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다소 생경하게 다가올 듯싶다. 물론 그 시대를 몸소 겪었던 세대에게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얼굴에 슬며시 미소를 띄웠을 법하지만 말이다. 80년대를 풍미하던 락그룹 하면 언뜻 송골매와 산울림이 떠오른다. 송골매는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그룹이다. 지금의 아이돌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한 인기몰이였다. 데뷔 당시만 해도 '아니벌써' 등의 락으로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산울림은 멤버인 동생들의 군입대로 김창완 홀로 고군분투,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오히려 발라드곡들이 히트곡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한다. 결국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송골매가 당시 락의 대명사로 떠오르던 시기이다. 

 

지환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미래를 투영할 수 있는 능력을 언급하면서 송골매 멤버 배철수가 먼 미래(2015년)에는 라디오 디제이를 하게 된다는 말을 꺼낸다. 배철수 얘기가 나오자 아이들의 눈은 유독 반짝인다. 지환은 또 이러한 언급도 한다. 개인마다 손바닥 만한 전화기 한 대씩을 들고 다니는데, 그걸로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또 심지어 TV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얘기를 듣던 주변 사람들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지만 말이다. 

 

 

우리는 아주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미래를 투영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앞서 언급한 스마트폰처럼 현재는 존재하지 않으나 가까운 미래에 크게 성공을 거둘 만한 아이템을 미리 선점, 큰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얄팍한 생각 따위 말이다. 물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뿐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 현재 자신의 처지를 180도 바꿀 수 있도록 그의 단초가 될 만한 사건에 개입하는 일도 한번쯤 꿈꿔 봤음직하다. 그런데 이는 사실 타임슬립 류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서도 청춘의 애틋한 사랑이 끔찍한 범죄로 그 인연이 다하게 되자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 특정 사건에 개입, 미래의 모습을 전혀 다른 결과로 뒤바꿔 놓곤 한다.

 

큰 틀에서 보자면 사랑을 소재로 한, 그것도 닿을듯 말듯 애절한 로맨스 영화이거늘, 대부분의 시간을 범죄 행각과 그를 쫓는 추적 스릴러 장르에 할애하면서 장르의 융합을 시도한다. 두 개의 장르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장점일 수 있겠으나, 완성도에 따라 자칫 이도 저도 아닌, 엉성한 작품으로 기억되며 관객들로부터 외면 당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할 법도 하다.

 

결국 극 전체의 흐름에 단초가 되는 사건의 개연성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추느냐가 관건일 듯싶은데, 영화 속 인물들이 겪게 될 미증유의 고통의 시작은 의외로 보잘 것 없게 다가오는 터라 솔직히 설득력을 크게 떨어뜨린다. 아울러 극 초반에 선보인, 서로 다른 시대의 교차 투영 장면은 무언가 어수선한 느낌인 까닭에 감독의 연출력이 두고두고 아쉽게 다가온다.

 

 

내세에 관한 믿음이 현실화되어 발현되는 등 동양적인 사상과 종교를 작품의 전제로 깔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로운 요소다. 물론 내세를 믿지 않거나 미래와 과거를 서로 교차 투영하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객에게는 완전히 맥이 풀리는 대목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잔혹한 범죄로 인연이 단절되고 사랑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선남선녀의 안타까운 현실을 판타지적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그 나름의 묘미로 다가올 법하지 않은가?

 

지환과 건우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끔찍한 현실을 경험해야 했던 여인 윤정과 소은은 서로가 서로를 잇는 운명 공동체다. 1983년의 사랑도 그렇지만, 2015년의 사랑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할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인연을 가로막는 요소는 사실상 매우 보잘 것 없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무엇보다 고통스러우며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는 한 세대를 관통하는, 아울러 현세와 내세까지 마구 넘나들며 멀어지는 인연을 다시금 부여잡기 위해 갈망하는, 지독히도 치열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감독  곽재용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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