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의료인의 양심에만 의존하기엔 불안한 세상

새 날 2016. 3. 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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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서울 다나의원에서 일회용 주사기의 재사용으로 C형 간염 환자가 95명 발생한 데 이어, 올해에도 강원도 원주시 한양정형외과의원에서 100여 명의 환자가 C형 간염에 감염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1회용 주사기의 가격은 개당 50원 가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해당 의료기관 측에서 단순히 이러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주사기를 재사용했을 것이라고 단정짓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속단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어쨌거나 비단 주사 바늘을 재사용하지 않더라도 주사기 내부로 얼마든 혈액이 혼입돼 C형간염 등의 집단 감염병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는 사실은, 의료 현장에서의 아주 사소한 부주의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국내 최대 병원 중 하나인 모 병원에서 구매하지도 않은 내시경 도구로 환자를 시술한 뒤 건강보험 급여를 허위로 받아갔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시술은 실제로 이뤄졌으면서도 납품이 안 됐노라는 증언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1회용 내시경 도구의 재사용 가능성을 의심케 하는 정황입니다. 물론 병원 측은 해당 의혹에 대해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도구의 경우 한 번 사용하고 나면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재사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뉴시스

 

내시경 도구의 재사용 위험성은 얼마전 빚어진 미국의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근래 미국에서 십이지장 내시경 시술을 받던 성인 2명이 수퍼버그(세균)에 감염되어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환자에게 내시경을 소독하지 않은 채 재사용한 결과가 이러한 사단을 빚고 만 것입니다. 의료인으로서의 윤리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일깨우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위장 및 대장의 상태를 확인하는 내시경은 이처럼 소독해서 재사용하는 의료기기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료기기라 해도 이번 미국의 사례처럼 집단 감염을 야기할 수 있는 개연성은 다분합니다. 때문에 해당 의료기기의 경우 일정 수준 이상의 소독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요? 일반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우스갯소리 하나가 있습니다. 병원에 위장이나 대장 내시경 도구가 새로 도입될 경우 병원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가장 먼저 내시경 시술을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저 역시 한낱 풍문이라 여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습니다. 하지만 근래 의료계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노라면, 가령 내시경의 재사용 시 요구되어지는 높은 수준의 소독 따위의 사안을 의료인들 스스로의 양심에 따른 잣대에만 의존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환자의 신체와 접촉했던 일회용 의료 도구를 버리지 않은 채 다른 환자에게 다시 사용하거나, 혹은 아무리 재사용 가능한 도구라 해도 미국의 사례처럼 제대로 된 소독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이는 환자의 신체에 기생하던 세균과 바이러스를 다른 환자에게 직접 옮기는 일과 진배없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료인들에게는 이러한 실수 내지 부주의가 매우 사소한 상황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사안이겠으나, 이로 인해 감염된 환자들은 자칫 생명마저 잃을 만큼 돌이킬 수 없거나 치명적인 피해로 다가오기 일쑤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형 병원 의혹 건은 해당 병원 측이 언론에 의해 불거진 사실에 대해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는 데다, 보건 당국이 관련 서류를 확인하여 보험급여 부당 수령 혐의에 대해 조만간 현장 조사에 나설 계획이라고 하니, 그 추이에 대해선 좀 더 지켜 봐야 할 상황입니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히 다뤄져야 할 사람의 건강과 생명, 하지만 근래 의료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의료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믿음에 균열이 생기고 있습니다. 의료인이라면 누구나 직업인으로서의 윤리적 지침을 따르겠노라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을 텐데, 최근의 잇단 사례들은 해당 선서를 무색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의료인과 환자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게 될 경우 자신의 생명을 의료인에게 온전히 맡겨야 할 환자 입장에서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을 테며, 의료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인해 소신 있는 의료 행위를 펼칠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입니다.

 

의료사고 피해자 조정 신청시 곧바로 분쟁 조정에 돌입 가능케 하는 이른바 '신해철법'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법사위의 파행 덕분에 본회의에 입성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상했던 결과입니다만, 의료인들의 반발과 방해 공작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해당 법이 통과되더라도 사실상 환자들에게는 그다지 실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의료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한 환자 입장에서는 의료 기관이나 의료인들에 비해 상대적인 약자적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에 해당 법의 통과는 그나마 진일보한 결과이며, 선언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의료인들의 방해를 뚫고 국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인들이 안심하고 의료인들에게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맡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의료인들의 자성이 절실합니다. 하지만, 근래의 사례로 놓고 볼 때 단순히 의료인들의 윤리적 양심에만 의존해서도 안 될 노릇일 듯싶습니다. '의료기관에서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료인들이 그렇게 할 하등의 이유도 전혀 없다'고 항변하는 의료기관의 주장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기 위해, 아울러 일반인들이 그들에게 무한 신뢰를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를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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