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처절한 생존본능

새 날 2016. 1. 1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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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아메리카 대륙, 이른바 서부개척시대라 불리던 당시는 대륙의 주인인 원주민들과 침략자인 바다 건너온 서양인들 간 생존을 건 혈투가 횡행하던 시기이다. 아울러 원주민인 인디언들 입장에서 볼 때 침략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땅을 강탈당한 데다 무차별 살육이 벌어지던 야만의 시대이기도 하다. 모피 사냥꾼인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아들과 함께 사냥 중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게 된다. 원주민들의 공격은 상당히 집요한 데다 매서웠다. 묵직하면서도 날렵하기까지 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황, 수많은 동료들은 이에 맞거나 원주민들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결국 일행은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하지만 많은 동료를 잃은 채 후퇴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옳기는 과정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일행을 진두지휘하던 헨리(돔놀 글리슨) 대위의 지시에 따르던 일행 중 일부가 아예 공개적으로 불만을 내색해 왔기 때문이다. 한편, 휴 글래스가 후퇴 도중 주변 지형을 둘러보던 찰나, 그만 거대 회색곰에게 습격 당하고 만다. 그는 사지를 물어뜯기는 중상을 입는다. 숨이 붙어있는 게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상처는 깊다. 눈이 쌓여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 그를 들 것에 든 채 옮기는 일만으로도 일행들에겐 더없이 고통스런 상황이다. 그렇다고 하여 숨이 붙어있는 그를 차마 죽일 수 없던 헨리는 일행 중 피츠 제럴드(톰 하디)와 짐 브리저(윌 폴터)에게 그가 죽을 때까지 잘 돌봐주고 끝까지 마무리해줄 것을 당부한 끝에 다른 일행과 함께 그곳을 떠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필라델피아 출신의 모험가이자 개척자였으며, 한 모피 회사에서 사냥꾼으로 일하던 '휴 글래스'라는 실존 인물이 겪었던 실화를 배경으로 한, 마이클 푼케의 소설 '레버넌트'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아울러 개봉 이전부터 제73회 골든글로브 4개 부문(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음악상)에 노미네이트되며 숱한 화제를 뿌린 작품이기도 하다.(며칠전 진행된 시상식에서 이 작품은 음악상을 제외한 3관왕을 차지했다)

 

실제로 관람하고 보니 골든글로브 3관왕의 영예가 괜한 게 아님을 실감케 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숨막히는 광활한 대자연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은 압도적인 스케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꿈틀거리는 한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처절하면서도 생생하게 연출해낸 감독의 능력은 그야말로 탁월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기기 위해 감독이 무척이나 심혈을 기울였다는 뒷얘기다. 특히 당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상황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자연 조명을 최대한 살리느라 애를 먹었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유일한 CG였을 법한 회색곰의 휴 글래스 습격 장면은 세계 영화사(史)에 한 획을 그을 만큼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껏 이토록 생생한 동물의 인간 습격 장면을 영화든 TV든 그 어떤 매체에서도 접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몇차례 공격하여 물어뜯는 장면이 아닌, 길다란 혀를 내밀고 얼굴을 샅샅이 핥으며 체액마저 뚝뚝 흘리는 생생한 모습은 그야말로 전율이 흐르게 한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세세한 묘사가 압권이다. 숨막힐 정도로 감각적인 표현이다.

 

휴 글래스의 아내는 원주민인 인디언이었으며, 그의 아들 역시 피부색 등 외모가 그와는 완연히 다른 인디언의 혈통을 잇고 있다. 그들 가족이 속한 포니족 마을은 과거 서양인들의 습격을 받아 휴 글래스의 아내가 숨지는 비극을 겪은 바 있다. 휴 글래스에게 있어 가족은 그의 삶의 원천이자 그를 생존케 하는 원동력이다. 영화 도입 부분부터 마지막 지점까지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다름아닌 일종의 인디언식 주술이다. 글래스가 다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기적처럼 4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이동해 살아돌아올 수 있게 한 생존 본능의 원천도 바로 그의 피붙이와 함께 이 주술적인 힘이 근간을 이루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서양인들 입장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의 침략 행위에 대해 개척이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할 테지만, 원주민인 인디언들 입장에서는 서양인은 그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잔학무도한 방식으로 빼앗은 침략자일 뿐이다. 침략자들의 잔인한 속성은 영화 속에서도 생생히 드러난다. 원주민과 한때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휴 글래스에게는 인디언의 피가 직접 흐르고 있지 않지만, 그의 아들의 핏속엔 엄연히 인디언의 피가 흐른다. 숨이 붙어있는 한 싸워야 하며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고 아들에게 읊조리는 장면은 그래서 뭉클하다. 그런 와중에 휴 글래스는 자신의 사업 파트너이자 침략자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피츠 제럴드에 의해 자신의 아들이 살해 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두 사람의 복수극은 때문에 그 속성상 결국 원주민과 침략자의 대리전 성격을 띠게 된다. 

 

설원에서 마구 뒹굴고, 때로는 말을 탄 채 공중부양을 일삼는 등 하늘을 벗 삼거나 별을 보고 잠이 들며, 심지어 얼어붙은 강물속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다. 보는 내내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으니 이쯤되면 말 다 한 셈 아닌가. 그가 사지가 찢긴 채 몸져 누워있는 상황에서 그를 죽이려 하거나 아들에게 해코지하려는 음모가 벌어지는 탓에 솟구쳐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울분을 토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처절하다. 그의 숨소리며, 카메라에 뽀얗게 뿌려지는 그가 내뱉은 김은 그에게 놓인 처지가 얼마나 황망한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대화는 많지 않지만, 온몸을 통해, 그리고 퍼런 눈동자에 연신 글렁이는 그의 눈물 한가득 차오른 얼굴 표정은 모든 걸 말한다. 난 느낄 수 있다.

 

 

비단 고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온몸으로 보여준 연기는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만으로도 모자라는 느낌이다.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플 것이다. 그동안 유독 아카데미와는 인연이 없던 그였지만, 제89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이 한층 가까워진 느낌은, 아마도 이때문일 듯싶다. 인간의 여러 본성 중 잔인한 속성을 여과없이 드러낸 피츠 제럴드 역의 톰 하디나 헐리우드계의 신예로 떠오르고 있는 윌 폴터 그리고 돔놀 글리슨 등 배테랑 및 신예의 연기 조화도 돋보이는 대목이다.

 

 

러닝타임이 꽤나 길다. 2시간30분은 족히 넘을 듯싶다. 하지만 시작 시점부터 엔딩 자막이 오르기까지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을 만큼 빼어난 몰입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휴 글래스의 처절한 생존 과정 때문에 나마저 숨이 차오른다. 올해 감상한 첫 작품에 불과하나, 어쩌면 2016년 한 해 가장 좋은 영화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대자연 앞에서의 인간은 언제나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하지만 자연과의 사투를 통해 생존을 이어온 원주민들은, 침략자들의 침입 때문에 자연뿐 아니라 어느덧 인간과 사투를 벌이며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극한 처지로 내몰리고 만다. 돌이켜보면 비극적인 역사의 한 페이지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사람이라더니 어쩌면 이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휴 글래스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몸부림치며 무려 4천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거리를 차디찬 한 겨울에 그것도 맨몸으로 헤쳐나와야 했을까? 스크린에서 직접 확인해 볼 것을 추천한다.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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