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사람보다 돈의 가치가 우선인 세상

새 날 2016. 1. 1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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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한 고등학교에서는 급식비를 제때에 내지 못한 아이들에게 교감이 급식비를 가져오지 않으면 학교에 오지 말라는 식의 발언을 하여 대중들의 공분을 일으켰던 적이 있다. 당시 교감은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기 미납 학생들에게 밥을 먹지 말라고 하거나 심지어 꺼져라는 등의 폭언을 퍼부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폭언을 들은 학생은 다른 친구들 앞에서 망신 당한 현실이 너무도 창피하고 화가 나는 바람에 식사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중간에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전해진 바 있다.

 

인천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서는 관리비 미납자 세대 명단을 공개하여 물의를 빚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이번 사례뿐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해당 아파트는 1140세대가 거주하는 대규모 단지로, 세대별 면적이 52㎡(약 16평)에서 69㎡(21평) 정도의 규모에 해당한다. '관리비 장기연체 세대 명단 공고'라 쓰인 해당 게시물은 엘리베이터 옆 아파트 현관 게시판에 부착되었으며, 여기에는 동과 호수, 연체 개월, 연체 금액 등이 적혀 있다. 

 

ⓒ노컷뉴스

 

이를 보도한 '노컷뉴스'에 따르면, 관리사무소 측은 입주자대표회의가 입주민 과반수 이상 동의를 얻어 마련한 '공동주택 관리규약'에 따라 관리비 장기연체 세대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해당 아파트 관리규약 제77조(관리비 등의 체납자에 대한 조치)에는 관리비 등을 3개월 이상 체납한 세대에 대해 각 동의 게시판 등에 동, 호수와 체납금액을 게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관리비를 장기간 체납하고 있는 데다 아파트 관리규약에 의한 조치라고 해도 이러한 방식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더구나 해당 아파트 단지는 주로 서민 계층이 거주하는 서민 아파트 범주에 속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앞서 언급했던 모 고등학교에서 급식비를 장기간 미납한 아이들의 가정 역시 대부분 저소득층일 가능성이 높다. 정황상 녹록지 않은 가계로 인해 아파트 관리비나 급식비마저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처지일 개연성이 높은데, 이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공개 망신이라는 매우 비정한 도구를 들고 나온 셈이다.  

 

 

이러한 조치는 가난이라는 굴레로부터 쉬이 벗어날 수 없는 세대나 가정에는 지나치게 잔인한 방식이다. 물론 이를 지켜보는 제3자로서도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가난이 죄가 될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가난을 죄인처럼 취급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해당 아파트 건을 다룬 포털의 기사 말미에 달리 댓글들을 보노라면 우리 사회가 한참이나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뜨악하다. 소위 베플이라고 하는 인기 댓글은 하나 같이 관리비를 체납한 세대를 향해 욕과 비난을 퍼부을 뿐, 아파트의 조치에 대한 문제 의식을 드러내는 글은 없다.

 

심지어 혹자는 가진 재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이거나 상습적으로 세금을 내지 않는 고액 상습 체납자와 비교하며 정부가 이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나섰듯, 아파트의 이번 명단 공개를 당연한 조치라고 말한다. 물론 이는 언어도단이다. 충분히 납부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음에도 이를 회피하는 파렴치범과, 납부하고 싶어도 제때에 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이들을 비교하는 건 한낱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관리비나 급식비를 제때에 납부해야 함이 옳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이를 제때에 내지 못하는 건 민폐이자 바람직한 결과라고 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세대마다 각기 나름의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고, 생각과는 달리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 사안일 가능성을 간과해선 안됨에도 불구하고 관리소 측이 무작정 세대명 등을 공개하고 나선 건, 가뜩이나 해당 사안을 해결하지 못해 고통을 겪고 있을 그들에게 모멸감과 자칫 씻을 수 없는 상처만을 안기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다. 이 대목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상처를 받아도 된다는 따위의 언어 도발은 삼가자.

 

 

가뜩이나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우리 사회이다 보니 사람의 가치보다 어느덧 돈의 가치를 더욱 높이 사는 것 같아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관리 사무소가 아파트 게시판을 통해 정작 공개해야 할 것들은 이러한 류가 아니다. 외제차 등 고가의 차량을 끌고 다니며 2개 주차면에 걸쳐 주차하는 몰염치한 사람들이나 장애인 혹은 여성 전용 주차 구역에 멋대로 주차하는 얌체족과 같이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거나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는, 몰상식한 사람들을 공개하는 게 여러모로 더욱 바람직스럽지 않을까?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공개 망신 주기의 효과를 언급하고 있다. 동과 호수를 공개하는 방식은 확실히 효과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편의주의와 성과주의 탓에 소외된 계층을 아프게 하고, 사람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를 더욱 치켜세우는 몹쓸 분위기를 사회 전반에 퍼뜨리는 효과를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심히 안타깝다. 돈이 없다고 하여, 혹은 가난하다고 하여 망신을 당하거나 상처를 입어도 된다는 거지발싸개 같은 소리는 아예 입에 담지도 말라. 가뜩이나 돈이면 최고인 세상에서 모든 가치가 돈의 하위 단계로 밀려나는 작금의 현실을 도저히 두 눈 뜨고 바라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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