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재난 앞에서의 우리, 판단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새 날 2016. 1. 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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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퇴근시간에 빚어진 서울 지하철 4호선 사고로 17명이 다치고 8백명에 이르는 시민이 어두컴컴한 지하 선로를 통해 한꺼번에 탈출해야 했다.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4호선의 운영 주체인 서울메트로는 이번 사고의 원인을 '고속도차단기'라는 장치가 고장 나 일시적으로 누전이 발생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각종 사고로 인해 전동차의 운행용 전력의 공급이 끊길 시 원래 객실 조명과 안내 방송만큼은 정상적으로 가동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해당 전동차는 사고 순간 비상용 전기마저 차단되고 말았다. 덕분에 가뜩이나 전동차의 객실 안이 어두컴컴한 상황에서 안내 방송마저 나오지 않는 바람에 승객들은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급작스레 멈춰선 전동차, 어두컴컴한 객실, 나오지 않는 안내 방송.. 승객들은 이 순간 어떤 상황을 떠올렸을까? 아니 여러분이 만약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과연 어떤 생각과 행동을 취하게 될까? 우리에겐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통해 얻은 교훈 몇 가지가 있다. 다름아닌 끔찍한 재난 상황과 만나게 될 경우 절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생명과 안전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승객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기관사와 선원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바람에 어이없게도 수백명이라는 고귀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날 전동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동차로부터의 즉각적인 탈출을 시도했다. 일종의 학습효과였던 셈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후부터다. 800명의 승객이 한꺼번에 한성대입구역과 성신여대입구역 사이 750m 터널을 통해 탈출해야 하는 상황, 만에 하나 뒤에서 열차가 따라오고 있거나 반대편 선로에서 또 다른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기관사가 바로 관제소에 알려 반대편 열차의 운행을 중단시켰고, 덕분에 2차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매뉴얼에 따른 대피가 아니었던 탓에 조치 시간이 30분 가량 지연됐으며, 지하철 승객들이 1시간 이상 발이 묶이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다면 사고 전동차의 비상용 전기가 정상 작동하고 있었고, 안내 방송이 제때 이뤄졌다면 이번 사례와 같은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까? 매뉴얼대로라면 기관사들은 화재 등 모든 사고 시 일단 무조건 다음 역까지 운행한 후에 승객을 내리도록 하고 있단다. 전문가들 역시 열차 내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일단 다음 역까지 가서 조치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땐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2년 전 발생한 2호선 상왕십리역 추돌사고 이후 수천억원을 들인 시스템을 통해 모든 상황을 실시간 파악할 수 있노라고 서울시와 서울메트로가 자신 있게 주장했지만, 또 다시 무용지물이 되고 만 셈이다. 매뉴얼 등 기본 시스템의 동작 여부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우린 일상에서 수많은 선택과 맞닥뜨려야만 한다. 때로는 사소한 선택일 수도 있겠고, 여타의 다른 선택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좌우할 만큼 매우 급박한 사안이 될 수도 있겠다. 이때 대부분의 선택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르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간혹 그렇지 않은 상황도 더러 있긴 하다. 



이번 사고와 같이 급박한 상황에선 본인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대중들의 움직임에 따라 의사를 결정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생명이 위협 받고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처음 한 두 사람의 움직임에 따른 여러 사람의 잇따른 움직임은 마치 조직 전체의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착각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이 무조건 옳거나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3의 법칙'이라는 이론에 따르면, 단 세명의 움직임만으로도 대중들은 조직 전체의 결정인 양 이들의 움직임을 신뢰하게 되며 흔히 그를 따르는 게 일반적인 까닭이다.(잇단 참사와 위기 우린 어떤 판단을 해야 하나 포스팅 참고)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군중심리다. 

 

그렇다면 재난 상황 하에서는 이렇듯 대중들의 보편적인 판단과 선택이 제일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될 법한데, 그동안 우리 사회가 보여 온 바와 같이 안전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거나 신뢰마저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다수의 대중들이 앞서 움직인 이들의 행동을 따르는 등 본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객실에서 연기가 치솟고, 전등이 모두 꺼진 어두컴컴한 상황, 기관사가 객실에 남아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내보내게 될 경우 대중들은 과연 기관사의 안내대로 객실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객실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것인지 당췌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물론 안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고, 국가 및 사회가 대중들의 신뢰를 충분히 얻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안내 방송을 따라야 함이 옳다.

 

그러나 사람은 불안과 공포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경우 본능에 의지하는 경향이 크기에 흔히 군중 심리를 따르는 게 일반적인데, 한참이나 미흡한 우리 사회의 재난 대비 시스템은 시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엔 여전히 태부족이다. 아울러 가만히 있으라고 하여 가만히 있었건만 결국 대형 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던 과거의 학습효과를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인 데다, 이후에도 수없이 발생하고 있는 참사 앞에서 대다수의 대중들은 안내 방송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현장에서 탈출하려는 심리를 드러내는 게 보편적일 테고, 결국 '3의 법칙'과 같은 군중심리에 의해 나머지 대중들 역시 앞선 그룹의 움직임을 따라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고의 원인을 낡은 전동차로 돌리고 있는 눈치가 역력하다. 물론 오래되어 정상 작동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들은 새 것으로 당장 교체해야 함이 옳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상황은 단순히 매뉴얼 등의 시스템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우리 사회는 적어도 안전과 관련한 영역에서만큼은 이미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그렇다면 재난 앞에 맞닥뜨린 대중들의 판단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선 무엇보다 바닥에 떨어진 신뢰를 일정한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게 급선무 아닐까? 아울러 진정으로 국가가 해야 할 몫은, 최악의 상황에서 대중들이 본능에 충실히 따르더라도 지극히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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