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이쁘다' 표준어 채택, 반갑지만 아쉬운 이유

새 날 2015. 12. 1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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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이 새로운 표준어를 등록했다는 소식이다. 총 11개 항목의 어휘와 활용형을 표준어나 표준형으로 새로이 인정했는데, 그 중 몇가지 어휘의 선정은 무척이나 반갑게 다가온다. 평소 일상 속에서 구어체의 형태로 많이 활용돼 오고 있으나 정작 표준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글을 작성할 때면 찬밥 신세로 전락해야 했던 '이쁘다'가 이번에 복수 표준어로 인정 받게 된 것이다. 현재는 포털 검색창에서 '이쁘다'를 칠 경우 '예쁘다'의 잘못된 표현이라는 결과가 화면에 뿌려진다.(새로이 등록된 표준어는 내년 1월 1일부터 반영될 예정이라고 하니 이는 당연한 결과다) 

 

그 밖에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 몇 가지 더 있다. 우선 우리가 무심코 사용해 오던 '잎새'라는 어휘가 원래는 '잎사귀'라는 뜻의 충청도 사투리로서 표준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에 비로소 표준어로 지정됐다. '마지막 잎새'라는 소설 제목을 떠올리면 다소 의외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비단 그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잎새'라는 표현은 흔히 사용돼 왔다. 아울러 '산책 나간다'라는 표현보다 왠지 '마실간다'라는 표현이 훨씬 정겹게 와닿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실'이 이번에 복수 표준어로 등극했다. 이 역시 반가운 일이다.

 

 

아울러 당황하거나 놀랐을 때의 감탄사 중 하나인 '이크'도 별도의 표준어로 추가됐다. 그렇다면 원래의 표준어는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이키'였단다. 그런데 통상 지금과 같이 놀라운 일을 겪을 때면 '이크'하고 외치게 되지, '이키'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기존의 표준어는 왠지 현실감이 크게 결여된 느낌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국립국어원의 존재 이유 역시 이렇듯 언어의 규범과 현실간의 괴리를 좁히기 위함일 테지만 말이다.

 

알다시피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은 온 우주가 인정하고 있는 바다. 비단 글자의 조합이나 제자 원리의 우수성 때문만이 아니다. 글자 서체 자체가 갖는 심미성도 굉장히 뛰어나다. 하지만 그보다는 순 우리말 어휘 하나 하나가 갖는 표현력에 다양하고 깊이가 있어 다른 여타의 문자들이 절대로 흉내낼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한글만이 지닌 진짜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푸르다'와 '푸르르다'는 거의 비슷한 의미이지만, 이를 읽는 사람의 입장에선 매우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된다. 특히 시적인 표현 등 문학 속에서의 쓰임새는 더욱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푸르다'라는 의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파랗다, 퍼렇다, 새파랗다, 푸르스름하다, 푸르르다, 푸르딩딩하다 등 다양한 양태로 나타낼 수가 있다. 이는 오로지 우리 한글만이 지닌 장점으로 꼽힌다. 한국 문학이 아직 노벨 문학상을 못받고 있는 건 다름아닌 이렇듯 다양하고 풍부한 느낌의 표현을 영어 등 기타 문자를 통해 제대로 옮기는 일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국립국어원은 '푸르르다'를 '푸르다'와 뜻이나 어감이 사뭇 다르다는 이유로 '이쁘다'의 경우와는 달리 별도의 표준어로 지정했다. 내가 아쉬워 하는 대목도 다름아닌 이 지점이다. 국립국어원이 기왕지사 '이쁘다'를 표준어로 지정할 바에야 '예쁘다'와 같은 의미로서의 복수 표준어가 아닌, '푸르다'와 '푸르르다'의 관계처럼 미묘한 어감 차이를 인정해 주어 별도의 표준어로 채택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이쁘다'처럼 구어체에서의 활용이 거의 대세이긴 하나 글자로 옮길 때엔 표준어로 인정 받지 못해 서자 취급을 받고 있는 어휘가 여전히 많을 듯싶다.

 

그렇다면 '예쁘다'와 '이쁘다'라는 표현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걸까? 나의 경우에만 해당될지 모르겠으나 아름다운 대상을 본 뒤 이를 구두로 표현할 때면 '이쁘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를 글로 옮길 때에 표준어가 아닌 까닭에 '이쁘다'를 '예쁘다'로 고쳐 표현해야 하는 경우가 흔했는데, 그럴 때마다 부족하거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라 무언가 아쉽곤 했다.

 

ⓒ국립국어원

 

물론 때로는 오히려 '예쁘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때가 있긴 하다. 이는 아마도 성인과 아이의 차이로부터 기인하는 뉘앙스 비슷한, 그러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즉,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쁘다'라는 표현은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을 때와 같이 단순한 미적 감각 측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돼 오는 반면, '예쁘다'라는 표현은 그보다는 앙증맞고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는 이미지의 쓰임새로 활용돼 오곤 하는, 그러한 류의 차이 말이다. 

 

두 어휘에는 콕 집어 표현하기에는 어렵지만 분명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주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마치 이번에 표준어로 채택된 '푸르르다'와 기존 표준어인 '푸르다'가 갖는 작은 차이와 흡사하다. 때문에 기존 표준어인 '예쁘다'와 새로운 표준어인 '이쁘다'가 같은 의미의 동등한 지위로서의 복수 표준어로 채택되긴 했으나, 사실 평소 이를 자주 활용해 오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두 어휘가 반드시 같은 의미와 어감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에 이번 결정이 반가우면서도 내심 아쉬움을 감추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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