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농약 사이다 사건, 무엇을 남겼나

새 날 2015. 12. 12.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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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 경북 상주시 공성면의 한 마을회관에서 사이다에 농약을 몰래 넣어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한 혐의로 기소된 박모 할머니에게 1심 법원이 11일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뜨거운 국민적 관심을 불러 모은 이번 판결은 국민참여재판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박 할머니가 사이다에 농약을 탔다고 진술하지 않았음에도, 아울러 이를 본 목격자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경로의 증거를 통해 피의 사실을 인정 가능케 했다는 게 법원 측이 밝힌 이번 판결의 특징이다.

 

그러나 박 할머니 본인뿐 아니라 가족이 이번 판결 결과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고 나선 데다, 변호인 측은 박 할머니가 범행을 부인하고 있고 목격자나 직접 증거가 없어 범인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일찌감치 항소를 예고하고 나선 터라 박 할머니의 진범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실은 수사 당국이 범행 동기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했고,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일찌감치 논란은 예상돼 왔던 터다.

 

SBS 방송화면 캡쳐

 

물론 난 이 포스팅을 통해 박 할머니가 진범이다 아니다를 언급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이제 고작 1심이 끝난 상황이고, 이는 결국 법원이 판단해야 할 몫일 뿐, 내가 나선다는 건 주제 넘은 행위이자 혼란만 야기하는 결과가 될 수 있는 탓이다. 여러 정황상 박 할머니가 유력한 용의자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드러난 정황 근거만으로 범인이라고 섣불리 단정짓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목격자가 없는 데다 수사 당국이 직접적인 물증과 범행 동기를 밝혀내지 못한 까닭이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도 하거니와 박 할머니 측의 주장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이번 판결 결과가 자칫 한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운 채 또 다른 피해자로 전락시킬 수도 있는 사안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수사 당국의 철저한 수사와 법원의 신중하면서도 공정한 판단이 요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탓에 명쾌한 해답을 내놓아야 하는 건 사법부의 의무이자 일종의 국민적 여망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이 터진 뒤 수사 당국은 대대적인 인력을 동원하여 마을 주민에 대한 탐문수사와 함께 증거물을 찾기 위해 마을 구석구석에 대한 수색에 나선 바 있다. 정황은 있으나 여전히 결정적인 물증이 나오지 않은 상황으로 유추해 볼 때, 증거 확보에 대한 강박 관념과 자신들의 명예 때문에라도 그 어느 사건보다 철저한 수색과 수사가 이뤄졌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박 할머니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게 된 셈이다. 



사건이 있던 날 마을회관에서 함께 화투를 치던 할머니들은 같은 마을에서 마치 친자매처럼 지내왔던 이들이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듯 지역사회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이웃은, 가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빼꼼히 얼굴을 비추는 웬만한 피붙이보다 외려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그들이 누군가 농약을 투입한 사이다를 나눠 마신 뒤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다. 경찰의 전방위적인 수사는 피붙이보다 더 친밀한 데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 오던 마을 주민들을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도록 만들거나 반목케 하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하고도 남는다. 끈끈했던 마을 공동체는 이번 사건 하나로 풍비박산 났음이 틀림없다. 정이 넘쳐나던 마을엔 어느덧 '의심'이라는 괴물만이 휑하니 남은 채 온통 을씨년스런 모습 일색일 테다.

 

때문에 나로선 농약 사이다 사건의 발원지인 '상주'라는 특정 지역명을 직접 거명하는 일조차 신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언론들은 여전히 '상주 사이다 사건'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해 오고 있다. 특별히 좋은 일도 아닌 사안에 대해 대중들로 하여금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이거늘, 언론들은 그러한 일에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다. 마을 공동체마저 무너진 상황에서 지역 이름이 들어간 기사 타이틀로 인해 해당 지역민 전체가 이중고를 겪고 있는 데도 말이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농약 사이다를 마시고 사망했거나 다친 이들 및 그 가족들일 테다. 일부는 당시 목숨을 부지했더라도 이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사람을 믿지 못하는 심각한 병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된다. 하지만 만에 하나 범인으로 지목된 박 할머니가 진짜 범인이 아니라면, 이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박 할머니 역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피해 당사자가 되고 말 테니 말이다. 법원의 판단은 그래서 중요하다.

 

아울러 이번 사건이 빚어진 마을과 주민들 역시 직접적인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본의 아니게 이름이 오르내리는 상주시와 시민들 또한 간접적인 피해자가 되고 있다. 얼마전 가짜 생수 파동을 겪으며 누군가 선의로 건네오는 생수조차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게 만들고 있듯, 이젠 이런 사건 따위로 인해 무심코 건네오는 음료수에 대해서도 마음 편히 마실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의 진범이 정확히 가려지든 그렇지 않든 그와는 별개로, 결국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 피해자가 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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