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안락사, 누군가에겐 절실하지만 우리에겐 사치 아닐까

새 날 2015. 8. 2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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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든지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기 마련입니다.  아니 어쩌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예고 받은 채 이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고 봐야 함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운명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최근 죽을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자신의 나라를 떠나 이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를 찾아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는 기사 하나가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이른바 안락사 전문 지원 병원을 자처하는 스위스의 디그니타스 병원의 사례인데요.  이곳에선 지난 17년간 1905명이 안락사를 택했고, 다른 곳과 달리 유일하게 외국인을 받아 온 덕분에 그 중 91.81%인 1749명이 외국의 국적 소유자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 안락사 문제는 세계 곳곳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을 만큼 여전히 뜨거운 감자에 해당하는 사안입니다.  이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행위인 존엄사와는 달리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죽을 권리를 보장 받은 채 의사의 조력을 통해 약물을 투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의 죽음에 해당합니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자살이지만, 의사의 도움을 얻는 방식이기에 조력자살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디그니타스 병원 외관 ⓒ세계일보

 

안락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는 반면,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의사의 처방에 따라 끊게 하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에 위배되는 행위이자 이를 허용할 경우 생명경시 풍조가 더욱 만연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두 의견 모두 일리가 있는 탓에 사실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 것이냐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는 상당히 어렵기만 합니다.  저 역시 이 포스팅을 통해 둘 중 어느 의견에 손을 들어줄 것이냐 따위를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현재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는 국가는 스위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미국 뉴멕시코 등 5개주, 캐나다 퀘벡 정도입니다.  프랑스는 현재 상원에서 심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고요.  그런데 해당 기사를 보며 유독 눈에 밟히는 대목 하나가 있었습니다.  간호사 출신의 건강한 70대 영국 여성이 "늙는 것이 끔찍하다"며 안락사를 택했다는 내용 때문인데요.  질 패러우라 불리는 이 75세의 여성은 그 나이대에 흔하게 나타날 수 있는 지병조차 없는 매우 건강한 상태였으며,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출신으로 성실하게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생전에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막 언덕 꼭대기에 올랐다는 것을 안다.  앞으로 더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보행기로 힘겹게 걸으면서 행인의 길을 막는 늙은이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70살이 될 때까지 난 매우 건강하다고 느꼈고 여전히 나 자신이 쓸모 있다고 봤다.  그러나 비록 지금 건강하지만 내 삶이 다했고 죽을 준비가 됐다고 느낀다.  늙는 건 끔찍하고 늙는 건 죽음보다 더 못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연합뉴스의 카드 기사를 인용해 볼까 합니다.  이 기사에서는, 노화는 실제로 '죽음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슬프고 부정적인 것일까, 아니면 인생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과정일까를 물으며, 미국의 여배우 수전 서랜던이 남긴 다음과 같은 글 한 조각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전 늙는 게 기대돼요.  겉모습은 점점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고 진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핵심이 되니까요"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어느 경우에나 유효한, 바람직스런 기제로 작용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저라고 하여 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는 문득 다른 생각 하나를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영국이란 나라의 노후 복지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우리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결국 한국이 아닌 영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의 경우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등 노후 생활을 보장해주는 공적 연금의 보장 수준이 너무 낮아 노년에도 일을 하지 않을 경우 최소한의 생활조차 유지하기가 힘이 드는, 1차원적인 구조적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연합뉴스

 

다수의 노인들에게 있어 하루 하루를 연명한다는 건 일종의 지상 최대의 과제에 속하는 일입니다.  노인빈곤율 OECD 1위가 이를 극명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즉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권리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는 아마도 영국과 같이 노후 보장이 잘 갖춰진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 거리에 버려진 폐지를 주워 하루 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연명하고 있는 노인들이 즐비한 우리네의 현실에서는 그러한 사치(?)를 부릴 만큼의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죄다 선진국 일색입니다. 

 

세계 자살률 1위와 노인자살률 OECD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만에 하나 안락사할 권리가 주어지게 될 경우, 이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결과를 빚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품위 있는 죽음, 아울러 인생에 있어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과정이라며 누군가 위로해주곤 하는 노화라는 축복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오로지 생존 그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노년층에게만 해당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각자도생이라는 척박한 환경에 내던져진 채 생존 자체를 염려해야 하는 건 이 땅을 살아가야 할 모든 계층에게 던져진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당장의 삶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 앞에서 노화를 축복으로 받아들이자는 격문도 그렇거니와 품위 있는 죽음과 생명의 존엄성 따위의 언급 역시 모두 사치에 불과해 보일 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땅에서는 앞으로도 생존해 있는 자체가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어야 할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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