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아베 담화, 진정한 반성도 사죄도 없었다

새 날 2015. 8. 1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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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4일 오후, 전후 70년 담화를 발표했다.  이번 담화에는 '식민 지배', '침략', '사죄', '반성' 따위의 핵심 키워드가 모두 담겨 있다.  그러나 주어가 언급되지 않거나 명확하지 않은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어 그 진정성이 몹시 의심되는 상황이다.  아베 담화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과거 무라야마나 고이즈미, 고노 담화를 놓고 단순 비교해 보더라도 A4지 5장 분량에 해당하는 이번 담화의 행간 사이에 담긴 저의가 심히 의심스러워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아베 담화의 뿌리는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당시 총리가 발표한,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대한 일본 정부 최초의 공식적인 사죄가 다름아닌 이 담화인 탓이다.  무라야마 담화에는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여러분에게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줬다.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적 사실이며 깊은 반성에 입각해 독선적인 국수주의를 배척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NHK 방송화면 캡쳐

 

이렇듯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및 침략에 대한 반성과 직접적인 사과를 표했던 무라야마 담화와는 달리 이번 아베 담화는 그 표현 방식이 그야말로 참 아베스럽다.  "우리나라는, 앞선 전쟁에서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반복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기분을 표명해 왔습니다.  그 생각을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냈고,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의 나라들, 대만, 한국, 중국 등, 이웃인 아시아 사람들이 걸어왔던 고난의 역사를 마음으로 새기는 자세를 일관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가 그동안 반성과 사죄를 반복해 왔다는 과거의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즉 절대로 아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직접 사죄하지는 않은 채 과거형 간접화법 내지 유체이탈 화법으로 일관하는 지극히 교묘한 방식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총리나 장관 등이 충분히 사죄하고 반성한 과거가 있으니 그로 대신하겠다는 의미다.  참으로 비겁하다.  사죄라는 형식은 갖추되, 자신이 직접 하지 않음으로써 대외적으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가의 비난으로부터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는 핑계거리를 마련하게 된 셈이고, 일본 대내적으로는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지배 및 침략에 대한 정당성 인정이라는 명분마저 얻겠다는, 두 마리 토끼 모두를 잡겠노라는 꼼수로 읽힌다.

 

"사변, 침략, 전쟁. 어떠한 무력의 위협이나 행사도,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두 번 다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식민지 지배로부터 영원히 결별하고, 모든 민족의 자결의 권리가 존중받는 세계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베는 이날 담화에서 '침략'이란 단어를 단 한 차례만 사용했다.  그러나 앞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침략했다는 표현은 빠진 채 국제 분쟁의 틈 바구니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보다 더욱 괘씸한 부분은 다음 문장이다.  "일본에서는, 전후 태어난 세대가, 지금이나, 인구의 8할을 넘고 있습니다.  과거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우리들의 아들이나 손자, 그리고 그 앞의 세대의 자손들에도, 계속 사죄해야 하는 숙명을 짊어지워서는 안 됩니다"  전후 세대이자 미래 세대에게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이는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항구적 책임"이라고 역설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과거사 인식과도 뚜렷하게 대비되는 부분이자, 피해 당사자는 물론 그 후손들에 대한 입장 따위에 대해 전혀 배려하지 않겠다는 만용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베의 진짜 속내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편 이번 담화에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나 문구 또한 철저히 배제됐다.  "우리들은, 20세기에 전쟁 때문에 많은 여성들의 존엄이나 명예가 깊이 상처를 받게되는 과거를, 이 가슴에 새겨나가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이러한 여성들의 마음에,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되고 싶습니다.  21세기인 만큼, 여성의 인권이 상처입는 일이 없는 시대를 만들려고 세계 사회를 이끌어 왔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47명이 생존해 있고, 이에 대한 보상 등이 한일 양국 사이에 첨예한 문제로 불거지고 있는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하려 한 정황으로 읽힌다.  1993년 8월 발표된 고노담화에는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는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로서 고통과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민감한 건이나 치부가 될 만한 사안은 노출과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고, 형식적인 단어 몇 마디만을 늘어놓는 방식으로 긍정적인 측면을 최대한 부각시키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노컷뉴스

 

결국 아베 담화에는 과거에 대한 반성도, 사죄도, 그 무엇 하나 올바르게 된 표현이 없다.  진정성 있는 사과보다는 오히려 과거사를 교묘하게 미화하려는 표현 일색인 탓이다.  일본이 그들 스스로 말하고 있듯, 세계 평화와 국제 사회 질서에 순응하고 참여하려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과거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한 직접적이고 진솔한 사죄가 선행돼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번 담화를 통해 그동안 미흡했던 부분을 해소해 주길 기대했건만, 결과적으로는 광복 70주년이라는 뜻깊은 날에 오히려 국민들의 감정만을 더욱 상하게 만들고 만 셈이 돼버렸다.  

 

전후세대에게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며 궤변을 늘어놓은 아베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과거사에 대한 항구적인 책임을 언급하며 무릎을 꿇은 채 진심 어린 사죄를 해오고 있는 독일 지도자들을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  이러한 변명과 궤변 따위로는 제아무리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아베 담화에 대한 조건부 수용의 뜻을 표명했다 해도, 그와는 별개로 이미 악감정에서 분노로까지 치닫고 있는 일본에 대한 국민 감정을 놓고 볼 때, 한일관계에 있어 절대로 미래를 보장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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