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고단한 현실 비튼 잔혹 판타지

새 날 2015. 8. 1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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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남(이정현)은 중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에 취직할 것인지, 아니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엘리트가 될 것인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후자를 택했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다행히 손재주가 뛰어난 덕분에 주산이면 주산, 타자면 타자 등 자격증이란 자격증은 죄다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교를 졸업하고 취업할 즈음엔 컴퓨터가 등장하며 수남이의 자격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돼버렸다.  아울러 정작 사회에서는 이러한 자격증 몇 개보다 외모 등 다른 요소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어느 작은 공장의 경리 사원으로 채용된 그녀, 하는 일이 자신과 맞지 않아 고민도 하곤 했으나 같은 회사에서 재직 중인 한 남자(이해영)를 만나 결혼에 성공하는 등 잠시잠깐 동안이나마 작은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선천적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공장의 작업 환경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청력이 좋지 않아 귀에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의 청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어 결국 거의 전부가 소실되고 만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통해 인공적으로 청력을 도와주는 방법이 있단다.  무려 2천만원이라는 비용이 소요된단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란 남편은 나중에 낳게 될 아이에게 만큼은 자신과 같은 환경을 물려 주어선 안 된다며 어떡하든 집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한 채 수술을 마다 하겠단다.  그러나 수남의 설득 끝에 결국 수술을 하게 되고, 어느날 그가 공장에서 작업하던 중 인공적으로 청력을 도와 주던 바로 그 기계가 그만 오작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의 오른손 손가락들이 잘려나간다.

 

실의에 빠진 부부, 그래도 집 장만만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남편의 평소 신조에 동조하며 수남은 이때부터 몸을 사리지 않은 채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선다.  낮에는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거나 남의 집 청소 등을 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신문 배달에, 저녁엔 명함 전단 따위를 돌리는 일 등등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은 채 닥치는 대로 온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수남의 계산에 따르면 지금처럼 벌 경우 대략 11년 정도면 작은 집 하나를 장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수년이 지나고 돈이 제법 모이긴 했으나 집값 또한 덩달아 올라, 계산했던 시일 내에 집을 장만하기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결국 수남이는 은행의 도움을 통해 조그마한 집을 장만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청력 소실에 손가락마저 잘린 채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남편이 어느 날 수남에게 유서 한 장 달랑 남긴 채 자살을 기도한다.  다행히 수남이가 도착했을 때엔 그의 목숨이 아직 붙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식물인간이 된 채 병원 침대에 하루종일 누워 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자신의 전부인 남편의 자살 시도로 인한 수남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여유를 부릴 겨를도 없다.  남편의 병원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선 과거보다 더욱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장만한 집이 재개발 예정 지역으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영화는 시종일관 기괴하면서도 슬프고, 또 우스우면서도 씁쓸한,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복잡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표정이나 다소 생뚱맞은 몸짓들, 그리고 결코 고급스럽지 않은 화면과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굉장히 명료한 대사 하나 하나가 이러한 특징들을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단함과 아픔을 이렇듯 역설적인 방식으로, 잔혹한 판타지적 요소와 장치를 통해 투영시키려 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영화 속에서 정수남이 처한 고단한 환경과 고통은, 비록 픽션 속 세계인 데다 일종의 판타지에 불과할지 몰라도 우리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개연성 때문에, 아울러 고단한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비추는 듯한 느낌 때문에, 보는 내내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애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이들 부부는 그로부터 벗어나려 무지 애써 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더욱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며 그들 부부를 꽁꽁 옭아매고 만다.  가난으로부터 비롯된 속박의 그림자는 그로부터의 탈출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수남의 어쩔 수 없는 성실함(?)을 통해 잔인한 방식으로 깨닫게 한다.  다음 세대는 자신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더욱 고된 성실함이라는 마약 같은 악순환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셈이다. 

 

수남이 점차 괴물로 변해 가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다름아닌 이익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주변 인물들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없다.  바로 우리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아저씨나 아줌마와 같은 평범한 이들인 탓이다.  재개발이라는 헛된 욕망을 좇으며 이웃 간 얼굴을 붉히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성실함만으로는 계층 이동이 어려우니 부동산을 이용하여 쉽게 돈을 벌겠다는 욕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그도 여의치 않으니 모두가 로또에 목을 매고 있음이리라.  이러한 욕망들이 얽힌 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던 와중에 수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괴물이 되어 갔다.  어쩌면 이 괴물의 존재는 수남뿐 아니라 나를 비롯한 모든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정현의 연기력은 정말로 놀랍다.  엽기적인 정수남의 역할이 왜 이정현이 아니면 안 되는지, 이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  순진함에서 잔혹함 그리고 더 없이 불쌍해 보이는 역할까지, 극과 극을 오가는 무한 팔색조의 연기력은 이 영화의 몰입도를 최고조로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녀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과연 무엇이 정수남을, 아니 우리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을 성실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으며, 점차 괴물로 변모시키게 한 걸까?  아울러 그녀의 잔혹하기 짝이 없는 복수극에 우리는 왜 통쾌함을 느껴야만 하는 걸까?  도대체 왜?  정수남이 처한 어려움은 그저 단순한 판타지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다소 엉뚱하고 기괴하지만, 높은 현실감과 쾌감을 선사해 준다.  정수남 그녀와 비교해 결코 만만치 않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을 현대인들, 한층 고착화된 계층 덕분에 상향으로의 이동은 더욱 어려워진 반면, 오히려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밀려나는 작금의 현실 앞에서, 이러한 잔혹 판타지를 통해 잠시나마 대리만족감을 느끼며 위로를 얻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감독  안국진

 

* 이미지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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