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학벌주의 조장, 언론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새 날 2015. 7. 3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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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남편의 직업이 바뀐다',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열공해서 성공하면 여자들이 매달린다'

 

이게 무슨 말일까?  한 문구류 업체가 시중에서 판매하고 있는 노트 등 학용품에 쓰인 글귀다.  언뜻 보기엔 아이들의 학습 열의를 돋우려는 일종의 격문이자 재미적 요소를 가미한 듯싶지만,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성별 학력 직업에 대한 차별 등의 인권침해적 요소가 담겨 있는 탓이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부지불식간 심어질 편견과 혐오의식은, 아이들이 이 다음에 커서 성인이 된 후에도 변함없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한 축으로 작용할 터이기에 그저 단순하게 받아들일 사안이 아님은 분명하다.

 

ⓒ뉴시스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 논란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얘기가 아니다.  얼마전 불거졌던 미국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동시 입학을 주장했다 거짓으로 들통난 ‘천재 수학소녀’ 해프닝은 명문학교 진학과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학벌주의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낸 사례 중 하나다.  출신 학교가 사회적 계층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탓에 그렇지 못한 출신에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실제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벌주의의 주요 배경엔 대학 서열화를 빼놓을 수 없다.  전국 대학들이 이른바 일류대학에서부터 서울 및 수도권 대학, 그리고 지방 소재 국립대, 사립대 식으로 순위가 매겨져 대중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이러한 대학 서열화의 고착은 한국 교육을 멍들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 중 하나이자 학벌주의 사회로 가는 핵심 통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렇듯 체제화된 대학 서열구조가 미치는 해악은 생각보다 크고 깊다.  교육 현장 전체를 일류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한 입시경쟁의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이는 결국 사교육 붐을 조장하거나 공교육을 부실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 채 궁극적으로 학벌사회의 폐해를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작용한다. 

 

이를 향한 경고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특정 언론사가 매년 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꾀한다며 대학 순위 평가를 매겨 오고 있고, 이에 대해 일부 학생들은 “학벌주의와 서열화 조장”이라며 이를 아예 거부하고 나선 점이나 법의 허점을 노린 채 대형 입시업체의 홈페이지 등 온라인 상에 명문대 현수막을 내걸고 있는 행위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이의 자제를 권고하고 나선 현실은 이를 반영하는 잣대다. 

 

MBC 방송화면 캡쳐

 

그러나 이러한 사회 일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의 행태는 영 미덥지가 못 하다.  30일 밤, 운동하던 도중 우연찮게 듣게 된 모 방송사의 뉴스 보도 한 꼭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20일 발생한 서울 서초구 잠원동 새마을금고 강도 사건에 관한 소식이었는데, 피의자가 명문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하여 강북구의 한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경력이 있단다.  그런데도 왜 이런 강도 짓을 벌인 건지 이를 보도하던 앵커의 반응은 놀라움 일색이다.  물론 해당 방송사만 그런 게 아니라 인터넷 상에서 관련 키워드로 검색할 경우 비슷한 논조의 기사를 우린 수도 없이 접할 수 있다. 

 

서울대 출신이라 놀랍다는 반응 일색이다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 온 사건도 아닌 데다, 이미 그의 검거 소식이 며칠 전 알려진 터라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그 후속 사연들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가정법을 한 번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다.  만에 하나 강도 피의자가 서울대에, 체육교사 출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상세한 후속보도가 가능했을까?  서울대가 아니라 지방의 이름 모를 대학 출신이라면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까?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데 있어 학벌과 직업이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서울대 출신일 경우 강도 등 범죄 행각을 일삼지 않는다는 보장이라도 있다는 건가?  언뜻 그러한 뉘앙스로 다가오는 탓에 관련 보도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명문대가 아닌 데다 그냥 평범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강도짓을 하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결과이고, 이번처럼 서울대에 교사 출신이기까지 한 사람이 강도 행위를 일삼는다면 그렇게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지극히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할 방송사의 편견 한 번 정말 끔찍하다.  이러한 방송 및 보도 행태의 이면으로부터는 내심 서울대를 비롯한 소위 명문대에 대한 우월성을 그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듯한 면모를 엿볼 수가 있다.  짐작컨대, 학벌 서열화 구조가 언론계에도 예외는 아닐 법한 데다, 그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듯싶다.  

 

학벌주의로 인해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제법 길고도 넓다.  가장 피부에 와닿게 하는 건 결국 돈에 얽힌 사안일 테니 이와 관련한 통계를 한 번 살펴보자.  서울신문과 OECD의 '한눈에 보는 교육' 통계에 따르면, 고졸 평균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2011년 기준 전문대졸 근로자와 4년제 대졸 근로자가 받는 임금 격차는 무려 48%포인트라고 한다.  뿐만 아니다.  대학 서열화가 만들어내고 있는 형상 역시 자못 심각하다.  지방대를 졸업한 구직자 10명 중 8명이 학벌 때문에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단다.  취업 사이트 '사람인'이 지난해 지방대 출신 구직자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2.6%가 '학벌 때문에 구직 준비 및 활동 시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이에 대한 국민의식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실시한 교육여론조사 결과 56.7%가 '우리나라의 학벌주의는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응답했으며, 오히려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한 응답이 31.9%에 달해,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답변이 90% 가까이에 이르고 있다.  학벌주의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대학 서열화 문제 역시 응답자의 91%가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렇듯 사회 전반에 짙게 깔린 학벌주의는 앞으로도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고 있어 온통 암울함 천지다.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가 심지어 유치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할 정도이니 이쯤되면 말 다한 셈 아닌가.  물론 이의 문제는 어떤 한 가지만을 떼어놓은 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맞닿아 있다.  때문에 이의 해소를 위한 사회 각계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론은 오히려 이를 조장하려는 듯한 분위기 일색이라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공기라 일컫는 언론이 정작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도외시한 채 이렇듯 쓸 데 없는 곳에 관심을 쏟고 있기에 오히려 작금의 학벌주의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천재수학소녀' 해프닝 역시 언론의 부추김이 한 몫 단단히 거들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국민의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학벌주의가 만들고 있는 현재나 미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언론이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오히려 조장하는 듯한 행위는 언론의 막중한 사회적 책무를 망각하는 결과에 다름 아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인 학벌주의, 언론 역시 그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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