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월드컵 패배보다 시민의식 부재가 더 쓰리다

새 날 2014. 6. 2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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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응원전은 월드컵의 흥을 돋우는 필수 아이템이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함께 웃고 즐기는 이러한 문화, 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겐 굉장히 낯선 풍경 중 하나였다.  과거 시민들의 눈에 비친 대중들의 도심 집결 모습은 기껏해야 정권 규탄 시위 정도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의 감동은 우리에게 꽤나 좋은 경험으로 남아있으며, 나 역시 당시의 감흥을 잊을 수가 없다.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 이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거리응원을 펼치는 모습이 제법 익숙하다.  다행스러운 건 우리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렇게 열정적인 응원 문화에 흠뻑 빠져들 수 있도록 단 한 차례도 본선 진출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 전엔 본선에 오르는 일 자체가 우리에겐 너무나 어려운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이번 브라질 월드컵은 여러모로 과거 월드컵에 비해 흥이 덜 난다고들 한다.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가장 큰 세 가지를 꼽는다면, 역시나 두 달 여전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와 우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형편없는 실력, 그리고 시차에 따른 경기 시각 등이 될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3일 새벽 4시에 벌어졌던 대 알제리전엔 꽤나 많은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함께 응원전을 펼치는 모습을 연출했다.  더구나 이날은 기압골이 지나며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아 시시때때로 굵은 빗방울이 연신 떨어지고 있었다.  서울 시내 일대는 전날 밤부터 일찌감치 자리를 잡으려는 붉은색 옷의 시민들로 붐볐다.  강남 영동대로와 광화문 광장, 신촌 연세로 등의 도심 한복판엔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했다.  광화문과 영동대로 일대에는 각각 4만여명, 연세로에는 6000명의 시민들이 모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1차전 때보단 많은 인원이다.



그러나 이날 경기는 졸전을 펼친 끝에 4-2의 스코어로 대패하고 말았다.  잠을 잊은 채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던 수많은 시민들의 기대는 이미 전반전부터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때문일까?  거리응원전을 펼치던 인파들이 실망감 때문이었는지 전반전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지니고 있던 쓰레기들을 길바닥에 그냥 내동댕이쳐 버리는 게 아닌가.  이러한 분위기는 경기가 끝난 뒤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쓰레기는 스스로 처리하고 있었지만, 일부 시민들은 경기에서 졌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그렇지가 못 했다.

 

ⓒ뉴시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 흐리듯 이러한 시민들이 하나 둘 늘어가자 어느덧 도심은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길바닥엔 먹다 남은 음식과 술병, 담배꽁초, 응원도구 그리고 못쓰게 된 우산 등이 어지러이 널부러져 있었다.  상황은 약간 다르지만 이는 어쨌거나 일본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크게 대조를 보인다. 

 

지난 15일 월드컵 C조 조별리그 일본과 코트디부아르의 경기에서 일본은 1-2로 역전패 당하고 만다.  일본응원단이 엄청난 실망감에 빠졌으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들은 바로 경기장을 빠져 나가지도 않았으며, 모두가 합세하여 주변 쓰레기를 정리하기 시작, 이들이 머물던 자리엔 흔한 휴지 한 조각 남아있지 않은 채 말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경제 - 일본 응원단 모습

 

일본이 천상 선진국인 이유와 대한민국이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월드컵 응원단들의 뒷모습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경기에서 이겼을 경우 뒷처리를 말끔하게 정리하는 건 당연한 일인 반면, 졌다고 하여 무책임하게 자신들의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려두는 건 우리의 시민의식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제대로된 시민의식은 위기적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법인데, 우린 외려 가식에 의해 살짝 가리워져 있던, 그마저도 본질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다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월드컵에 여러 차례 출전한 팀이다. 하지만 브라질월드컵에는 나올 자격이 없었던 것 같다." 

 

이번 알제리전 결과에 대한 외신들의 잇단 평가다.  냉정하다.  외신들은 우리의 형편없는 축구 실력을 이유로 월드컵 본선 수준에 어울리지 못하는 팀이라며 비꼬고 있지만, 내가 볼 땐 경기력은 둘째치고 우리의 형편없을 만큼 얕은 시민의식 때문에라도 월드컵 본선 수준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팀이라 여겨진다.

 

우리 사회의 전반을 관통해 오고 있는 시민의식의 민낯을 다시금 드러냈다.  아무리 성형으로 떡칠을 해도 여간해선 잘 바뀌지 않는 모습이다.  이러한 좋지 않은 관습을 놓고 볼 때 우리에겐 경기에서 승리할 자격은 물론이거니와 길거리에 나와 응원할 자격마저도 없다고 본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여 축구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기 위해선 대표팀의 실력을 키워 전력을 가다듬는 일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시민들의 의식부터 올바르게 갖추는 일이 훨씬 중요할 듯싶다.

 

우리 축구대표팀은 대표팀 대로 경기에서 졸전을 펼치고 있고, 시민의식 역시 정확히 그만큼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응원에 나서기 전 자신이 과연 거리응원전을 펼쳐도 될 만큼 성숙한 의식 수준을 갖췄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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