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사전 투표를 마친 난 지방선거 당일 부모님을 모시고 새벽 댓바람부터 서천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체험 여행을 위해서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문자 한 통이 날아든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된 선거 관련 문자겠거니 하며 별 대수롭지 않게 열어본 난 그만 놀라고 말았다. 서울시의 투표율이 너무 저조해서 박원순마저도 위태로울 것 같다는 절친의 절규가 담긴 외마디였다.
시간은 이미 오후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설마 그렇게 되겠냐며 조금 기다려 보자고 답문을 보냈다. 곧 6시가 되고 일제히 방송국들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친구의 걱정은 기우에 그치는 듯싶었다. 서울은 무난히 당선권인 것으로 보이고 경기, 인천, 강원 세 곳이 경합지역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곳만이 상대진영의 우세였고, 나머지는 모두 나의 지지 후보들이 약간의 우세를 보였다.
해볼 만했다. 더군다나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선 조희연 후보가 월등히 앞섰고, 경기도의 이재정 후보마저 조전혁 후보를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비록 여행을 다녀온 나의 몸뚱아리는 파김치가 된 채 피곤에 절어있는 상황이지만, 지난 대선 때처럼 친구와 개표방송을 함께 보며 소주잔을 기울이기로 약속했다.
차가 서울에 떨어지자마자 친구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린 소주잔을 앞에 놓고 지난 대선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번만은 제발 그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이번 선거의 최대 관전 포인트 중 하나였던 교육감 선거에서 조희연과 이재정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는 결과로 인해 왠지 느낌은 좋았다.
이젠 경기, 인천, 강원 세 곳의 광역단체장이다. 이들 모두는 초경합 지역으로서 어차피 당선 윤곽이 나오려면 적어도 밤 12시는 넘어가야 한다. 우린 그 지루한 시간을 술로 채워갔다. 1차를 파하고 편의점으로 자리를 옮긴 우린 모처럼 기분 낸다며 평소엔 비싸서 사먹지도 못하는 아사히 맥주 한 캔씩을 끄집어 내왔다. 그런데 뚜껑을 따고 목넘김하는 순간, 아차 싶은 거다. 냉장이 되어 있지 않은 채였다.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 있나 싶었다. 냉장 진열대 맨 앞 줄에 가장 차가운 녀석들로 채워야 하는 기본 원칙을 알바가 무시한 게 틀림없다.
따뜻한 맥주가 성이 차지 않은 친구는 노래방에 가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더 하잔다. 그래 좋다. 시커먼 중년 남자 둘이서 노래방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목청껏 노래 부르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라.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어쨌든 빈 속에 소주와 따뜻한 맥주, 그리고 차가운 맥주까지 연거푸 쏟아 넣었더니 가뜩이나 피곤한 몸이 해체될 지경에 이른다. 친구와 헤어지자마자 집에 돌아온 난 그대로 뻗는다. 새날엔 제발 좋은 소식이 배달돼 있기만을 고대하며..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선거 결과가 궁금했다. TV를 켠다. 뜨아~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의 상황이다. 이미지를 놓고 볼 때 서울은 외딴섬이 되고 만 형국이다.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에서 모두 패했다. 그래, 이쯤되면 이건 틀림없는 징크스다. 친구와 함께 개표방송을 볼 때마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참담한 결과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게 아닌가.
수도권 모두 빼앗길 바랬던 순진한 기대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번 선거, 엄밀히 말하자면 새누리당의 승리다.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조차 이 정도의 호실적이라면, 아마도 그렇지 않은 상황에선 보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음이 틀림없을 테다. 박근혜의 눈물을 닦아주자는 읍소 아닌 읍소가 어느 정도의 약효를 발휘한 모양새다. 수도권을 모두 빼앗았더라면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 모두가 더욱 궁지로 내몰렸을 텐데 결과적으로 지역민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은 셈이다.
다만, 고승덕 후보의 자폭이 원동력이 된 조희연 후보의 교육감 당선은 너무도 통쾌했다. 또한 의원 시절 전교조 명단공개로 물의를 일으키고, 이후에도 각종 망언과 파렴치한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조전혁 후보가 이재정 후보에게 보기 좋게 밀려나게 된 것 역시 또 하나의 쾌거다. 바야흐로 교육계에 새로운 진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에 부는 이 바람이 튼튼한 씨가 되어 이 땅에 제대로 된 진보의 싹을 틔울 수 있으면 더 없이 좋을 것 같다. 아울러 박원순이란 걸출한 인물을 함께 키워 나가고 있는 서울시민들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일종의 징크스가 되어버린 개표방송 술자리는 앞으로 갖지 말자고 했다. 물론 징크스 따위 잘 믿지 않는 편이지만, 지난 대선 때부터 중요한 순간마다 발목을 잡아온 결과가 혹여 이 때문이라면 이는 분명 깨부숴야 할 대상임이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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