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5일부터 또 다시 해외 순방길에 오르지만 이번엔 영 속이 편치만은 않을 듯싶다. 미국 유력일간지 뉴욕타임즈(NYT)가 지난 13일자 '정치인과 교과서'란 제하의 사설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외신들의 오지랖은 왜 이리도 넓은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의 나라 일에 감 내놓으라 대추 내놓으라며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유, 도대체 무얼까. 물론 아주 간혹 가다 이런 오지랖이 고마울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뉴욕타임즈, "박근혜, 교과서에 한국인 친일 내용 축소 기술 원해"
그런데 이번 사설 보도를 통해 해외 언론이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대목보다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뼈 아픈 사실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뉴욕타임즈의 사설 내용이 알고 보면 대부분 시쳇말로 팩트란 사실이 그 첫번째고, 우리 언론계에 어른거리고 있는 언론통제라는 살벌한 그림자 탓에 참언론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이들이 죄다 숨죽인 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외려 해외에서 이런 사실을 보도했다는 부분이 두번째다.
뉴욕타임즈 해당 사설 홈페이지 화면 캡처
당장 정부가 해당 사설을 실은 뉴욕타임즈에 발끈하며 나섰다. 이례적으로 교육부와 외교부 두 곳에서 동시에 반박했다. 조태영 외교부 대변인은 14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뉴욕타임즈가 사실과 다른 내용을 들어 잘못된 주장을 한 것에 대해 강한 유감의 뜻을 표명하며, 보도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한 것이다. 아울러 향후 해당 언론사에 잘못된 사설과 관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도 밝혔다. 김문희 교육부 대변인 역시 14일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잘못된 사실관계에 근거한 뉴욕타임즈 사설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번만은 제발 뉴욕타임즈의 보도 내용이 쓸 데 없는 오지랖이자 틀린 지적이고, 정부의 반박이 옳은 것이었으면 더 없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해외 언론을 통해 우리의 대통령이 친일 행각을 벌이고 있으며 아베와 동급이라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낯 뜨거워 미칠 지경이다. 그렇다면 사설이 실제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길래 정부가 이렇듯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지 한 번 살펴봐야 할 듯싶다. 아래는 해당 사설의 우리말 번역본 전문이다.
< 정치인과 교과서 >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각각 자기 나라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는 새로운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밀어붙이고 있다.
아베는 문부과학성에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는 교과서들만 (검정) 승인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가 주로 우려하는 것은 2차 대전 시기에 대한 것으로, 그는 부끄러운 역사의 장(章)으로부터 초점을 이동시키고 싶어 한다. 일례로 그는 한국 '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밀어내길 바라며, 또한 (중국) 난징에서 일본 군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을 축소하려 하고 있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일본의 전시 침공들을 지워버리고 위험한 애국주의를 부추기려 한다고 말한다.
박근혜는 일본 식민통치와 탈식민 이후 남한의 독재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걸 우려하고 있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에 부역한 한국인들 문제를 축소하고 싶어 하며, 지난해 여름에는 한국 교육부에 새 역사교과서를 승인하게 밀어붙였다. 이 교과서는 일본에 협력했던 이들이 '강압에 의해 그랬을 뿐'이라고 쓰고 있다. (현재 한국의 전문가 집단과 엘리트 관료 중 다수는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가문 출신들이다.) 학자들, 노조들, 교사들은 박근혜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비난해왔다.
아베와 박은 모두 전쟁이나 (친일) 부역에 민감한 가족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연합국은 아베의 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를 A급 전범으로 체포했다. 박의 아버지 박정희는 식민통치 시기 일본군의 장교였으며 1962년부터 1979년가지 남한의 군사독재자였다. 두 나라에서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려는 이런 위험한 시도들은 역사의 교훈을 위협하고 있다.
실은 이렇게 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해외 언론 치고는 매우 시의적절하면서도 정수만을 제대로 끄집어내어 언급한 듯싶다. 교과서 문제는 국정 교과서 체제 회귀로 논란이 더욱 불거지자 최근 교육부가 해결책을 6개월 뒤로 멀찌감치 미뤄놓은 상태이며, 때문에 논란이 완전히 사그러들지 않은 채 여전히 불씨가 잠복 중인 휴화산 그 자체다.
박 대통령이 뉴욕타임즈에 발끈하는 진짜 이유
박근혜 정권, 정치권과 정부의 모든 가용 역량을 총동원, 역사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뉴라이트의 친일 왜곡 역사관을 반영한 교학사 교과서를 무리하게 밀어붙였지만, 교과서의 실 수요처인 일선 고등학교에서의 채택이 거의 이뤄지지 않자 자존심을 심하게 구기고 말았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가 결국 국정 교과서 체제로의 회귀다. 물론 애초부터 각본에 의한 수순밟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긴 했다.
지난해 검정 승인을 통과한 교학사 교과서엔 식민지근대화론을 연상케 할 만한 기술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의도적인 기록 축소 등 친일 교과서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으며,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미화 역시 숨김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울러 검정 승인을 통과한 이후에도 여전했던 수백건의 치명적인 오류와 날림 제작은 애초 검정 승인을 무사히 통과한 사실 자체가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만큼 허술하기 짝이 없어 정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꼴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을 볼 때 현 정권이 자신들의 역사관을 관철시키기 위해 밀어붙였다는 뉴욕타임즈의 주장이 결코 헛된 주장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전문가 집단과 엘리트 관료 내지 정치권에 여전히 친일세력과 그 자손들이 포진해 있다는 사실, 불행한 일이긴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딱히 꼬집어 잘못된 내용을 찾기 쉽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굳이 꼽아보라면 박근혜 대통령을 가장 화나게 한 부분은 아마도 마지막 대목인 선친의 군사독재자 언급 부분과 극우 망동을 일삼고 있는 일본의 아베를 동급으로 취급한 대목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앞서도 박 대통령은 유독 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폄훼 움직임이나 발언에 대해 발끈하는 모습을 반복하여 보여왔기에 그 부분이 나름의 아킬레스건인 셈일 테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다카키 마사오와 귀태 발언이었고, 근래엔 민주당 양승조 의원의 선친에 대한 타산지석 발언으로 청와대 홍보수석이 대통령 대리 자격으로 나와 눈물마저 보이며 격하게 흥분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러한 결과들을 종합해 볼 때 이번 뉴욕타임즈의 사설 내용 중 박 대통령을 가장 발끈하게 만든 대목은 그 무엇보다 선친에 대한 언급 때문이리란 관측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해외 언론을 통해 드러난 박근혜 정권의 민낯
과연 정부는 사설 내용 중 어떤 부분이 실제와 다르다고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교학사 교과서 관철을 위해 밀어붙이기 한 일? 아니면 일제 침략행위를 축소 기술하거나 독재를 미화하려 한 일? 그도 아니면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언급? 글쎄다.
물론 아베의 극우망동을 박 대통령의 행보와 동급인 것처럼 묘사한 뉴욕타임즈의 사설 한 토막은 조금 과도한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극우로 치닫는 일본과 우편향 교과서로 역사 헤게모니 장악을 시도하는 대한민국 공히 역사의 교훈을 잊은 듯 마주 보며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보이는 건 엄연한 사실이고, 그 끝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될런지 두렵기조차 하다.
언론을 통제하며 언론 자유도를 심하게 훼손시킨 현 정권, 덕분에 국내 언론에서는 이러한 솔직 담백한 기사들을 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해외의 오지랖 넓은 언론사들 덕분에 때로는 주옥 같이 아름다운 활자들을 만날 수 있어 더 없이 고맙다. 우리가 늘상 바라보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민낯이나 해외에서 바라보는 민낯, 제발 달랐으면 싶지만 안타깝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그저 씁쓸할 뿐이다.
아울러 해당 사설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유력 해외 언론을 통해 이런 방식의 보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현실은 우리 스스로를 성찰해보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선 결국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테고, 힘들게 쌓아 올린 대한민국만의 좋은 이미지를 하루 아침에 날려 먹는 결과가 될 수 있기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간 낯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해외 순방길에 나서는 박 대통령, 자신의 발 걸음이 다른 어느 때보다 더욱 무겁게 느껴져야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테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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