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적심허(做賊心虛)란 사자성어가 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박근혜정권 출범 이후 집권세력이 야당을 윽박지를 때마다 줄곧 써먹어 오던 "대선결과에 불복하겠다는 거냐"란 표현을 보고 있자니 신기하게도 이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여권의 '대선 불복', 무슨 의도로?
돌이켜보건대 야당에서는 대선 결과에 불복하겠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공개적으로 사용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 같다. 국정원 대선 개입과 관련한 책임자 처벌, 대통령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그리고 국정원의 개혁 요구를 견지해 왔던 터다.
그렇다면 야당에선 단 한 차례도 입에 담지 않은 '대선 불복'이란 용어를 왜 오히려 여권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압축해 볼 수 있겠다.
첫째, '대선불복'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 불거진 이후 국민들의 성토가 봇물 터지며 여권에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갈 때마다 야권을 압박하는 용도로 활용되어 왔다. 이는 곧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셈이니, 든든한 고정 지지세를 등에 업고 있는 여권이 야권을 정권 퇴진운동이란 불순한 프레임에 가둬, 자연스런 역풍을 몰고 오게하려는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의도로 보인다. 즉 부정선거를 감추기 위한 물타기 수단인 셈이다.
둘째, 최근엔 국정원 뿐 아니라 국군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 의혹마저 불거졌다. 아울러 윤석열 검사 사태를 통해 드러난 수만 건에 해당하는 국정원의 불법 트윗글은 놀라움을 넘어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말을 그들 스스로 빼내들며 역공을 취한다는 건 결국 도둑이 제발 저리지 않고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한 마디로 초조함의 발로다. 새누리당 뿐 아니라 여권과 집권세력 일각에서도 비슷한 속내를 내비치고 있다. 홍준표 경남지사가 22일 자신의 트위터에 "국정원 댓글이 110만 표 압도적 차이에 얼마나 영향을 줬다고 대선 불복종운동을 하는지 안타깝다"라는 글을 남겼다.
홍준표 지사와 박 대통령의 언급은 초조함의 발로
지난달 16일 개최됐던 3자회담 당시 박 대통령의 언급이 뒤늦게 화제다. 여야대표와 대통령 간의 3자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당 김한길 대표에게 "그렇다면 제가 댓글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것인가"라며 정색하듯 말했단다. 이는 김한길 대표가 22일 모 방송국과 가졌던 인터뷰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홍 지사와 박 대통령의 발언, 표현 양식과 의도에 있어 그 궤를 같이한다.
그들의 공통된 짧은 식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깟 댓글 몇 개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면 얼마나 미쳤겠느냐고? 물론 이분들 뿐 아니라 실제로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국가기관의 공작이 선거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선 그 누구도 명확한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 즉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그래, 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선거 결과에 전혀 영향이 없었다손쳐보자. 과연 이번 국기문란사건의 본질을 단순히 대선 결과에 대한 영향만을 놓고 얘기해야 하는 게 옳은 걸까? 그렇지 않다. 선거 결과와는 무관하다. 국정원과 국군 등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 자체가 문제라는 얘기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민주주의 정신에 대한 심각한 훼손 행위이기 때문이다.
홍준표 지사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서 당 대표까지 역임했던 분 아니던가. 광역자치단체장이 된 이후로 정치적 감각이 다소 떨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중앙 정치무대에서 조금 벗어나 있어 관심을 받지 못함 때문인 걸까?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살인미수죄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전직 검사께서 혹여 잊으신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110만 표가 아닌, 단 한 표라도 부정선거의 의도를 갖고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이제껏 국민들이 힘들게 쌓아 지켜온 민주주의의 공을 하루 아침에 훼손시키려는 시도와 진배 없다.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더군다나 국가정보기관이나 군의 개입으로 이뤄진 불법행위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검사 생활을 하셨다는 분이 이러한 기본적인 민주적 법 질서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박 대통령,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하여 야권의 입장 표명을 요구받을 때마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의 도움을 받은 일이 없고 , 강도 높은 국정원 내부 개혁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책임자 처벌 문제는 법원의 판결을 보고 할 문제"라는 한결 같은 입장만을 고수해 왔다. 사실상 더 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어 보인다.
물론 박 대통령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사과를 표명하자니 뒷감당에 대한 해결책이 없고, 그렇다고 하여 모른 척 하자니 이 또한 온당한 해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테다. 더군다나 최근 국군사이버사령부의 조직적 선거개입과 국정원의 대규모 트윗글이 발견되면서 더욱 궁지로 내몰리고 있는 처지 아니겠는가.
'대선 불복' 여부 판단은 국민 몫으로 남겨야
취임한 지 8개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정권의 정통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니,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나마 의지하고 있던 건 아무리 바닥을 치더라도 60% 가까이 유지되고 있던 지지율이다. 물론 여론조사 방법과 대상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그 자체를 믿지 못하겠다는 의견 또한 다수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슴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언정 머리로는 여론조사 결과 그대로를 인정해 보자. 이 정도의 지지세라면 자신을 당선시킨 51.6% 이상의 국민이 늘 곁에 있는 셈이니, 이제껏의 행보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으리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윤석열 검사 사태로 불거진 검찰 항명과 외압을 놓고 정치권의 치열한 수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여권과 야권은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해 각기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의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금 정쟁이 중요한 게 아니다.
국정원의 수만 건에 해당하는 트윗글과 군의 대선 개입 사안은 너무도 엄중하다. 군의 대선 개입을 셀프수사로 맡기기엔 미덥지 못한 측면이 많다. 당장 개인의 우발적인 행동으로 여론을 조성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과연 지난 대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낱낱이 까발려야 한다.
도둑이 제발 저린 이유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 배후는 부정선거다. 이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게 된다면, 그 배후가 낱낱이 드러날 테고, 책임질 사람들이 책임을 지면 그만이다.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진다는 전제 하에 정권의 정통성 문제도 그에 따라 자연스레 밝혀지게 될 테다. 따라서 '대선 불복'이란 용어를 정치권에서 정략적으로 이용해선 안 될 말이며, 이는 결국 엄정한 수사 결과와 더불어 국민들이 판단해야 할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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