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그가 휘두르고 싶었던 건 망치가 아닌 염력 아니었을까?

새 날 2018. 6. 1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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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한 남성이 누군가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폭행을 당한 사람은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자칫 큰 비극으로 끝날 뻔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망치를 휘두른 사람은 다름 아닌 서울 서촌에서 족발집을 운영하는 세입자였으며, 폭행을 당한 사람은 이 세입자가 임차한 건물의 주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극의 서막은 지난 2016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입자가 임차하고 있던 건물의 주인이 새롭게 바뀐 것이다. 건물주가 바뀌면 으레 그러하듯 건물의 리모델링을 기점으로 종국에는 임대료 인상이라는 형태로 귀결되는 게 건물을 둘러싼 생태계의 일반적인 경로다. 이 건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 건물주는 건물의 리모델링과 동시에 보증금 3천만원에 월 297만원이던 기존의 임대료를, 보증금 1억원에 월 1200만원으로 4배 이상 인상, 이를 세입자에게 요구하고 나섰다. 


세입자가 반발에 나선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그러나 명도 소송을 낸 건물주가 결국 법원의 판결에 힘 입어 승소하였고, 곧이어 강제집행 절차가 진행됐다. 그동안 동료 활동가들의 도움으로 수차례 진행된 집행을 막을 수 있었으나 지난 3일 새벽 중장비를 동원한 집행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세입자가 결국 분을 삭이지 못 한 채 건물주에게 망치를 휘둘러 상해를 입힌 것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력은 온당치 못 한 행위이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높게 치솟은 임대료를 건물주가 무작정 세입자에게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성적으로는 그의 행위가 분명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신기하게 심정적으로는 그의 분노 및 행위가 십분 이해되고도 남는다. 서촌은 낙후됐던 구도심이 번성해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인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지역이다. 사람이 몰리다 보니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고 땅값이 오르면서 임대료가 덩달아 뛰어 오른 곳이다. 


이런 판국에 영세 상인들의 상가 임대 보호 차원에서 마련된 상가임대차보호법은 해당 세입자에게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했다. 임차 기간이 법에서 보장한 5년이 넘은 탓에 해당 법이 보장하는 계약갱신요구권이 없어 건물주의 명도 소송에서 패소하고 만 것이다. 이 법에 따르면 임차 기간이 5년이 넘을 경우 이번 사건의 사례처럼 건물주가 임대료를 기존 액수의 수 배를 인상하거나 심지어 재계약을 거부하더라도 전혀 지장이 없도록 돼 있다. 자본이 그들의 본성인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기에 꼭알맞은 조건인 셈이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5년은 누군가에겐 길다면 길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사실상 영세 상인들에게 있어 사업 영위를 위해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고 일정 수준의 이득까지 얻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던 처지에서 급작스레 그 앞에 닥친 기가 막힌 불운, 세입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혹시 영화 '염력'에서의 주인공 류승룡처럼 초능력을 발휘, 기꺼이 자본의 횡포에 맞서는 모습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자본은 그 생리상 무지막지하다. 비단 영화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염력에서 류승룡의 아내와 딸 신루미가 경험했던 것처럼 자본이 재산권 행사와 관련하여 어떤 식으로든 법적인 정당성을 부여 받기만 하면 자비란 일절 없다. 하지만 경제적 약자가 현실에서 기댈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처지를 그나마 영화 '염력'에서는 초능력이라는 가상의 기댈 곳을 마련, 이를 통해 쌓인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묵은 찌꺼기를 배설케 하고 있으나, 이번 사건의 세입자가 유일하게 기댔던 곳은 비슷한 처지로 내몰린 동료들뿐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몇 차례의 강제집행을 막았을 뿐, 흡사 영화 '염력'을 실화로 옮겨놓기라도 한 듯 중장비를 동원한 자본의 무지막지한 새벽 집행만큼은 이들로써도 어쩔 수 없었다. 세입자는 영화속 류승룡도, 영화처럼 가상의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꿈이라면 언젠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라도 품지, 이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 그는 법에 기댈 수도, 염력을 발휘할 수도 없어 결국 망치를 꺼내들고 만다. 그가 휘두른 망치는 외견상 건물주를 향하고 있으나, 실은 보호 받을 수 없는 처지로 그를 내몬 법과 제도 그리고 틈만 보이면 야만적인 이빨을 드러내는 탐욕스러운 자본을 향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현실에서의 망치는 영화속 염력에 다름 아니다.


현재 국회에는 임차인의 계약갱신 청구 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는 방안이 포함된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등이 발의돼 있으나 정치권의 드루킹 특검 논란 과정 속에서 이의 처리마저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생계가 막막해진 한 자영업자가 자신의 꿈을 송두리째 앗아간 이 세상을 향해 분노가 가득 담긴 망치, 아니 염력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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