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보통사람의 전쟁 공포감을 극적으로 묘사한 영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

새 날 2018. 4. 22.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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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히로시마 바닷가의 한 작은 마을, 이 곳이 삶의 터전인 스즈(노넨 레나)는 그림 그리는 일을 무척 좋아하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다. 그런데 그녀에겐 맹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를 잘 알고 있던 터다. 단점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인간미가 느껴져 오히려 그녀만의 매력으로 다가오게 한다. 부모님의 부족한 일손을 거들고 삼남매와 늘 부대끼며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던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에 쿠레 지역의 슈사쿠(호소야 요시마사)와 결혼하게 된다. 



남편이 될 사람의 얼굴조차 모른 채 결혼한 그녀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없는 쿠레의 시댁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낯 설었으며 일 또한 고되게 다가왔지만 유난히 착실했던 그녀는 이러한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서 차츰 슈사쿠의 집안 사람이 되어간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에 의해 점차 짙어가던 암울한 그늘은 그녀가 살고 있는 지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의 위협이 그녀의 일상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되는 공습경보와 대피 상황, 일본의 패배가 시시각각 가까워올수록 긴장감과 위협은 고조돼가며 그녀에게 더 없이 소중하던 것들을 하나 둘 앗아가는데....  



2차 세계대전이 일반 소시민들을 어떻게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으며, 전쟁이 삶을 어떤 방식으로 파괴하였는지 평범한 여성인 스즈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애니메이션 형식을 빌려 표현한 작품이다. 후미요 코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그림은 수채화처럼 투명하며, 극은 아주 느릿느릿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그에 반해 전쟁의 위협은 시시각각 사람들의 숨통을 조여들어온다.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 둘 잃어가는 와중에도 스즈의 감정은 크게 동요함이 없다. 때문에 더욱 안쓰럽다. 스즈의 삶은 당시 여성들이라면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방식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운명인 양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순응하며 받아들이곤 했다. 극 중 슈사쿠 누나의 경우 진로 결정은 물론, 결혼과 이혼까지 모든 걸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던 삶과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스즈는 자신의 처지를 탓하기보다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때로는 집안을 지켜야 하는 가장으로서,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 현실에 충실하며 맡은 바를 묵묵히 해내는 여성이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던 전쟁의 위협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공포로서의 구체적인 형태를 띠어간다. 발 아래 펼쳐진 해안가에는 항공모함 등 온갖 종류의 군함이 정박해있으며, 공습경보 싸이렌이 울리고, 전투기의 굉음만 요란하던 전쟁의 어스름한 모습은 얼마 후 구체적인 형태의 공포로 급변한다. 



서로 총탄과 포탄을 퍼붓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혹은 부상을 당하는 직접적인 전투 장면이 아니더라도 이렇듯 공감각적 분위기만으로도 전쟁의 공포감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는 영화 '덩케르크'가 청각을 통해 전쟁의 현실적인 공포를 고조시키던 대목과 비슷한 지점이다. 더구나 애니메이션 장르로써 이 정도의 효과를 연출했다는 건 감독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게 하는 대목이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건 일본 정부다.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스즈 같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영화는 전쟁의 위협이 일상을 살아가던 보통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이들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는가에 대해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담담히 묘사하고 있다. 



동일본대지진 등 엄청난 재난 앞에서도 유독 침착함을 유지하던 일본인들의 성향이 어쩌면 이 작품 속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즈도 그렇지만, 전쟁의 참화로 가족을 잃거나 전 재산을 잃은 이들이 부지기수임에도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북돋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마도 이러한 경향성이 무수한 재난과 전쟁 속에서도 오늘날의 경제대국 일본을 성장시키고 유지해온 저력 아닐까 싶다. 


스즈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비록 하나 둘 잃어가지만, 체념이 아닌 그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과물로 받아들이며, 결국 어떡하든 나머지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수채화 같은 영상은 너무 아름답고, 스즈의 감정은 온갖 풍파에도 큰 동요가 없으며,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데 반해 앞서의 것들을 한꺼번에 삼켜버리려는듯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전쟁이라는 끔찍한 존재감으로 인해 유난히 슬프게 다가오는 영화다. 



감독  카타부치 스나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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