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갑질 공화국의 웃픈 현실, 부끄러움은 왜 우리 몫인가

새 날 2018. 4. 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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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벌 오너 3세인 대한항공 조현민 전무의 이른바 '물벼락 갑질'이 논란에 휩싸였다. 파문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비난 여론마저 들끓고 있는 와중이다. 이렇듯 조현민 전무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다시 한 번 갑질 바람이 뜨겁게 불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사실상 진작부터 갑질 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비슷한 사례는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대한항공 재벌 가문의 삼남매 사례는 단연 으뜸이다.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수 년 전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이며, 둘째 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 역시 20대 때 교통사고를 일으켜 이를 단속하던 경찰관을 치고 달아난 전력이 있고, 2005년에는 70대 할머니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한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 밖에 언론에 알려진 재벌 2세와 3세의 갑질 폭행 사례만 해도 그 수를 일일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우리에게는 잊을 만하면 흔히 불거지곤 하는 악습 가운데 하나다. 


ⓒ머니투데이


물론 갑질 행위는 대기업만의 전유물이라고 볼 수도 없다. 사회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내리갑질이라 여겨질 정도로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가 됐든 비슷한 문화가 만연해있다. 이를테면 2년 전에는 모 중소업체 대표가 여객기 안에서 술에 취한 채 한국인과 승무원 등을 폭행, 무려 2시간 동안 소란을 피운 사건이 있었다. 이렇듯 잊을 만하면 불거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갑질 논란은 해외에서도 관심거리이자 흥미를 유발하는 사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마도 이러한 연유 탓이 클 것 같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지난 16일 이번 대한항공 사건을 보도하면서 'Gapjil'이란 표현을 사용했다고 한다. '중세시대 영주처럼 부하직원이나 하도급업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만의 문화적 특성인 갑질을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어서, 즉 단어 하나로 도저히 번역할 수 없는 까닭에, 그냥 우리의 언어 그대로 영문자로 옮겨져 사용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재벌이라는 단어는 'chaebol'로 일찌감치 영어사전에 등재된 바다. 실제로 영어사전에서 해당 단어를 검색하면 우리말로 '재벌'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갑질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겐 매우 친숙한, 가족 지배 대기업 집단을 해외에서는 달리 나타낼 방법이 없다 보니 갑질처럼 한글로 읽을 때 소리나는 그대로 영문자로 옮겨 표현한 방식이다. 하긴 재벌 가문이 그룹 전체 계열사를 소유한 채 경영권을 몇 대째 세습하고 있는, 혈연 기반의 경영 지배 시스템을 한국 이외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울 테니, 이를 깊숙이 헤아리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대목일 테다. 


JTBC 방송화면 캡쳐


뿐만 아니다. 지난해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이 공항 입국장에서 이른바 '노룩패스' 논란을 일으켰을 당시 영국의 인디펜던트지가 한국 중년 남성들의 권위의식을 그의 행동에 빗대어 'gaejeossi'라는 단어로 이를 소개한 바 있다. 많고 많은 단어 중 하필이면 '개저씨'라니, 이 끔찍한 낱말이 '재벌'처럼 또 다시 영어사전에 등재되는 사단이 벌어질까봐 벌써부터 두렵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자랑스러운 한글이, 비록 발음 따라 영문자로 표현되는 방식이긴 하지만, 전 세계에서 신조어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데다 반겨할 만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해당 단어들의 면면과 그 쓰임새를 살펴보면 민망함에 차마 얼굴을 들 수조차 없다. 이러려고 한글을 만든 게 아닐 텐데 말이다. 세종대왕께서 만약 살아계셨다면 틀림없이 자괴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해외에서 수입된 긍정적인 의미의 신조어와는 달리 우리의 것은 전근대적이면서도 후진적이고 권위적인 이미지로 얼룩진 단어들이 주로 수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조어란 무릇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말을 일컫는다. 즉, 이를 통해 현재의 시대상이 반영되며,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혹은 앞으로의 경향성 따위를 예측하는 잣대로 활용되기도 한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의미하는 work-life balance (WLB) 우리말로 '워라밸', 인생은 한 번뿐임을 뜻하는 YOLO 우리말로 '욜로', 이들은 근래에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외국에서 들여온 대표적인 신조어다. 주로 삶의 변화 의지 같은 밝고 긍정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 반면 우리가 해외에 수출(?)하고 있는 신조어들은 갑질, 재벌, 개저씨 등 하나 같이 부끄러운 내용들 일색이다. 이는 자칫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이미지마저 갉아먹는 결과물로 이어지게 할 공산이 크다. 정작 갑질 행위를 일삼는 부류들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데 왜 부끄러움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되어야 하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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