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여성다움 남성다움의 강요, 왜 문제인가

새 날 2018. 4. 1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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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은 2년 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이후 사회적 약자들의 의지를 반영하거나 저항을 표현하는 도구로 자리매김해왔습니다. 최근 사회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미투 운동과 관련해서도 이의 활약은 기대 이상입니다. 교수의 성폭력 의혹이 불거진 연세대학교 연구실 문 앞에는 이의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라는 학생들의 주장이 담긴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어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덕성여대, 성신여대 등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포스트잇 연대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기도 합니다. 


ⓒ국민일보


포스트잇은 고등학교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서울의 한 여자고등학교 건물 창문에 붙은 포스트잇 문구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촉발시킨 바 있습니다. 학생들은 창문에 '미투(#MeToo)', '위드유(#WithYou)' 라는 문구를 붙여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한 연대 의사를 표시하고, 교내에서 불거진 교사의 성폭력 문제 해결 촉구와 성폭력을 향한 강한 저항의 의지를 내비친 것입니다. 


ⓒ서울신문


하지만 오늘날 폭발하고 있는 미투 운동의 근원은 생각보다 훨씬 뿌리 깊은 곳에 위치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릴 적부터 형성돼온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물일 개연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제 한 언론사가 단독보도한 학교 교훈과 관련한 내용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교육 현장이 보수적이며 변화 속도가 느리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이번 사례는 정도가 조금 지나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심각해 보입니다. 놀랍게도 조선시대에나 사용될 법한 의미의 문구들이 버젓이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럼 몇 가지 사례를 한 번 살펴 볼까요? '착한 행실', '고운 몸매', '용서한다', '참는다', '순결' 등 구시대적 여성성을 유독 강조하는 문구들로 빼곡합니다. 이는 남성은 강해야 하고, 여성은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따위의 성역할의 강요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읽힙니다. 생애발달단계상 청소년기는 가치관이 정립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 아이들이 이렇듯 편견 가득한 정서를 강요 당해온 셈입니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된 게 아닐까요?


ⓒ서울신문


하지만 비단 이뿐일까요?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부지불식 간에, 아울러 다양한 매체와 채널을 통해, 여성성 및 남성성을 강요당해왔습니다. 과거의 얘기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교훈처럼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습니다. '상어가족'은 유아들에게 인기있는 동요 애니메이션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상어가족 중 여성인 엄마와 할머니에게는 각각 '어여쁜'과 '자상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으며, 남성인 아빠와 할아버지에게는 '힘이 센', '멋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여성은 반드시 예쁘고 자상해야 하며, 남성은 무조건 힘이 세고 멋져야 한다는 따위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편견인데요. 이를 통해 우리 아이들에게 성역할을 고착화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는 셈입니다. 


유튜브 영상 캡쳐


마트의 장난감 코너는 또 어떨까요? 일반적으로 남아와 여아의 상품을 따로 분리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아 코너로 먼저 가볼까요? 어떻던가요? 온통 분홍분홍한 것들 천지 아니던가요? 그와 반대로 남아 코너엔 푸른색 계열로 가득합니다. 여자는 분홍, 남자는 파랑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어린 아이들에게 각기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을 암암리에 심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주변이 온통 이러한 환경 일색이니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미투 운동이 한창입니다. 그동안 가부장적인 남성다움에 억눌려 지내오던, 유독 여성다움이라는 정서를 강요 당해온 여성들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는 양상입니다. 강한 남편에게 짓눌려 살아오던 아내가 노년에 접어든 뒤 뒤늦게 과거의 억울했던 삶을 보상 받고자 반기를 드는 사례를 많이 봐왔습니다. 미투 운동은 이의 사회적 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미투 운동에 본격적으로 불을 당긴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통신망에 쓴 폭로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아빠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착하고 예쁜 내 딸'이었다" 가정에서건 학교에서건 마트에서건 어떤 경로에서건 모든 사람들이 한결 같이 여자는 예쁘고 착해야 하며 참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남자는 씩씩하고 대범해야 하며 강하게 자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강한 남성다움, 그리고 의존적 여성다움의 강요가 오늘날과 같은 성차별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 성폭력을 야기해온 경향이 큽니다. 성폭력을 근절시키고 성차별 및 혐오 현상을 없애기 위해선 다른 성별의 입장이나 사상 등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 즉 '젠더 감수성'이 절실하다는 말들을 흔히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성다움 여성다움 등의 성역할을 고착화시켜온 정서적 고문을 없애고, 유아 적부터 편견을 심어주거나 학교 교훈을 통해 암암리에 특정 의식을 심게 하는 환경을 개선시켜 여성과 남성 등의 성별적 특성이 아닌, 인간다움을 강조하고 나서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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