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투명가방과 펜스룰

새 날 2018. 4. 4.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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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 브루노에 위치한 세계 최대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 본사 건물에서 3일 오후 느닷없는 총기 소음이 울려퍼졌다. 총격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쇼핑몰, 학교, 집, 그리고 직장 등 사람이 모이고 머무는 곳이면 어디든 관계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총기 사고가 발생하는 미국 사회다. 지난 2월, 17명의 애꿎은 목숨을 앗아간 플로리다 더글러스 고교 총격 사건을 계기로 가뜩이나 총기 규제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한창 가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건은 작금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연합뉴스


때문에 더글러스 고교 생존 학생들의 주도로 지난달 24일 열린 총기규제를 위한 행사는 이번 논란의 정점이라기보다 또 다른 논란의 시작점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행사는 미국 전역에서 개최되었으며, 워싱턴DC에만 무려 8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할 정도로 미국인들의 총기 규제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총기 규제 행사가 개최된 지 불과 10일만에 또 다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미국에서는 1999년 콜로라도 주 컬럼바인 고교 총격 참사 이래 20년 동안 200여 명의 학생이 학교 총격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외신에 따르면 같은 기간 193개 학교에서 18만7천 명의 학생이 총격 사건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렇듯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르면서 미국 사회 전역은 일종의 총기 울렁증을 앓고 있는 듯보인다. 지난달 17일에는 커클랜드에 위치한 병원을 방문한 한 남성이 소지한 검은 우산을 총으로 오인, 전 병동이 폐쇄되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MBC 영상 캡쳐


어쨌든 총격 사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미국 사회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예컨대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안은 플로리다 더글러스 고등학생들의 가방은 여느 학교 학생들의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더 이상의 비극이 발생하는 것을 막겠다며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투명가방을 메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면서도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볼 때 현재 우리 사회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의 반작용 현상으로 남성들 사이에서 지지세를 모으고 있는 '펜스룰'과 판박이로 여겨진다. 펜스룰이란 성추행범으로서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면 남성이 애초 여성과의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취지의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한 발언에서 유래된,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를 성폭력 무고에 남성들이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이 펜스룰이 미투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을 더욱 조장하는 역할만 할 개연성이 높다. 성폭력 방지를 위한 묘책이라기보다 외려 여성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수단이 되기 십상이란 의미다. 미투 운동의 취지와 본질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암암리에 자행되고 있는, 권력에 의한 폭력을 돌아보고 이를 반성하자는 데 있다. 


투명가방이 총기 사고를 막기 위한 본질적인 해법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미국 내에서는 학생들의 사생활 침해라는 또 다른 논란으로 불거지고 있는 양상이다. 마찬가지로 펜스룰은 미투 운동의 해법이라기보다 남녀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고, 또 다른 성차별로 변질시킬 우려가 다분하다. 

 

해마다 셀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이 총기 사고로 숨지고 있고 청소년들이 이의 규제를 외치며 일제히 거리로 나서도, 본질적인 해결 없이 투명가방 따위의 미봉책만 남발하는 이상, 정작 뒤에서 총기 판매를 부추기고 독려하는 총기 판매업자나 그들과 결탁한 정치인들의 잇속만 채우게 하고 반대로 시민들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마저 침해 당하게 되듯이, 그 본질은 엄연히 권력 구도에서 비롯된 성범죄와 관련한 사안임에도 남성들의 다수가 이를 못마땅하게 받아들여 펜스룰로 여성을 배제하는 행위는, 정작 미투 운동을 권력형 폭력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 이끌어내기 보다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갈등으로 변질, 또 다시 약자들끼리의 싸움으로 전락시킬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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