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상실감을 감싸안은 따스한 도피처 '가족시네마 - 순환선'

새 날 2018. 2. 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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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정인기)는 실직 가장이다. 하지만 가장이라면 대개 그렇듯이 집에는 이러한 사실을 알릴 수가 없는 처지다. 중학생 딸이 하나 있고 아내(김영선)가 이제 곧 출산을 앞둔 상황이라 상우는 자신의 처지를 곧이 곧대로 알릴 수가 없다. 그가 대신 선택한 건 위장 출근이다. 아침 출근 시각이 되면 평소와 다름 없이 출근 복장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채 지하철에 오른다. 그것도 순환선에.. 


종착지 없이 계속해서 같은 노선을 반복해서 달리는 순환선은 상우처럼 일정한 목적 없이 시간을 때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무가지를 펼쳐 들고 처음부터 마지막장까지 글자 하나하나 빠뜨림 없이 꼼꼼하게 읽어내려가도 시간은 더디 흘러만 간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아도 배꼽 시계는 정확한 법이다. 어느덧 점심시간, 간이매점에서 구입한 빵 한 조각으로 허기진 배를 간단히 채우고는 다시 열차에 오르는 상우, 자리에 앉아 있으니 아기를 업은 한 처자(박현영)가 열차 내에서 구걸하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자신도 곧 아기가 태어날 입장이기에 남 일 같지가 않다. 심성 고운 그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선뜻 건네며 호의를 베푸는데...



실직의 고통은 생각보다 크다. 언젠가 본 통계조사에서 2,30대가 느끼는 행복도가 전 연령대 가운데 가장 높았는데, 이는 나이가 들수록 점차 낮아져 50대에 이르면 저점을 통과하게 된단다. 이때 최고와 최저 행복도의 수치 차이는 대략 1점 정도였으며, 실직을 당할 경우 행복도의 점수가 0.8점 정도 낮아진다고 하니 실직의 고통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가를 대략적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을 땐 잘 모르다가도 실직을 당한 뒤 자신이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는 몸소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돌아올 그를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상우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아마 밥이 목구멍으로 제대로 넘어갈 리 만무할 테다.



실직을 당하고 가족에게 이를 차마 알리지 못한 채 예전의 출근 복장 그대로 외출, 하루를 소일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의외로 많다. 주로 산 같은 곳에 올라 조용히 하루를 보낸 뒤 퇴근 시각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곤 하는 게 그들의 일과다. 물론 이를 위한 어느 정도의 사전 준비는 필요하다. 정장을 입은 채 산에 오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상우가 실직 후 처음으로 지하철을 찾았을 때도 지하철 보관함에 양복을 벗어놓은 채 등산복으로 갈아입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를 멀찍이 떨어져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우는 아마도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으리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사무실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건만, 그들은 자의반 타의반 자신들 곁에서 벗어난 상우와 어느덧 높다란 담을 쌓은 채 외면하기 바쁘다. 신분이라는 작은 변화 하나는 이렇듯 당사자에겐 더없이 커다란 장애물로 다가오기 일쑤다. 이러한 현실과 떡 하니 맞닥뜨리게 된 그는 자괴감이 부풀어올라 어느덧 터질 듯한 기세다. 


이런 상황에서 상우를 더욱 옥죄어오는 건 얼마 후면 곧 세상에 태어날 아기였다. 만삭의 아내는 예정일을 앞두고 불안한 몸과 마음을 상우에게 더욱 기대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번뇌와 고통은 커져만 간다. 아내와 태어날 아기 그리고 큰 딸, 이들을 생각할수록 상우의 머릿속은 터질 듯 복잡해지고, 짓눌러오는 압박감과 불안 심리는 끝을 모른 채 같은 궤도를 무한 반복하는 열차와 함께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급작스런 실직, 이는 한 소시민의 삶에 폭탄을 투하하는 격이다. 물론 자칫 단란했던 가정을 뿌리째 뒤흔드는 결과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가정은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가장 기본 공동체인 까닭에 우리 사회의 안정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를 단순히 한 사람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영화는 실직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순환선에 오른 한 남자의 일과를 쫓으며, 실직이 어떻게 심신을 피폐하게 하고 그로 인한 영향이 개인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다가오게 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오늘도 어두운 지하 궤도를 쉼 없이 달리는 순환선은 누군가의 상실감을 포근히 감싸안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따스한 도피처가 되어준다.



감독  신수원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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