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당장 행복해지자

새 날 2018. 2. 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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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의 자식 사랑은 끝이 없다. 이것저것 먹거리를 잔뜩 보내오셨다. 새해 들어서만 벌써 몇 번째인가. 이번에도 손수 재배하거나 만든 것들이다. 설날에 떡국을 끓여 먹으라며 가래떡을 넣어 보내셨는데, 너무 맛이 좋은 바람에 설날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건만 진작에 다 소비하고 말았다. 떡국도 끓여 먹고 떡볶이도 해 먹다보니 남을 리가 만무했다. 덕분에 설날 떡국은 정작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방앗간에서 사다 먹든 마트에서 사다 먹든 어떻게든 안 되겠는가 싶다. 


직접 기른 감나무에서 딴 감으로 곶감도 만드신 모양이다. 지난 가을엔 대봉감과 단감 등 종류별로 한 박스를 보내오시더니 이번엔 곶감까지 넣으셨다. 시중에서 파는 것과는 그 모양새 하며 색깔 하며 확연히 달랐지만 맛은 여느 곶감보다 월등했다. 오며 가며 간식으로 즐기기엔 더없이 훌륭했다. 이런 방식의 세상 유일무이한 장모님표 먹거리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가량은 택배로 배달되어 오는 것 같다. 김장 김치만 해도 종류별로 벌써 수 차례 배달돼 왔다. 



물론 우리집에만 이런 먹거리가 보내지는 건 결코 아니다. 처제와 처남 등에게도 일일이 배달된다. 양으로 따지면 정말 어마어마하다. 그럼에도 장모님은 이제껏 힘든 기색 하나 없으셨다. 당신께서 손수 가꾸고 만들어 온 먹거리를 자식들에게 보내는 일만으로도 행복감에 빠져드는 게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로부터는 당신의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들에게 만큼은 뭐든 좋은 걸 해주고 싶어하는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들의 한결 같은 성정 따위가 느껴진다. 


얼마 전엔 특별히 사위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며 꿀에 잰 인삼을 아예 커다란 통째 보내오셨다. 지극정성이었다. 그 전엔 양파즙을 한 박스 보내오신 적도 있다. 인삼과 홍삼 류는 평소에도 챙겨 먹곤 하는 먹거리다. 물론 내가 직접 챙긴다기보다 이 역시 부모님의 성화가 한 몫 단단히 한다. 이렇듯 부모님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은 한결 같은가 보다. 그러나 사실 난 이를 잘 안 먹는다. 일종의 약처럼 매일 꾸준하게 섭취해야 하는데, 의무감이 배제되다 보니 솔직히 그게 잘 안 된다. 그냥 잊고 지내다 보면 한켠에 자꾸만 쌓여 간다. 그러다 보면 눈에 안 띄는 곳으로 옮겨가게 되고, 또 그러다 보면 더욱 더 손에서 멀어진다. 결국엔 잊혀지기 일쑤다. 장모님껜 정말 죄송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요일, 집안 청소를 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부터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기로 돌리던 참인데 누군가로부터 선물로 받은 듯한 박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법하건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오늘따라 이 박스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해 박스를 뜯고 말았다. 견과류였다. 이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걸까? 유통기한부터 살펴본다. 아뿔싸, 이미 지난 제품이었다. 그러니까 지난해 여름까지 해치워야 했다. 


지난 설에 누군가로부터 받았던 선물임이 틀림없다. 당시 겉포장을 뜯고 어떤 제품인가 확인한 뒤 다시 고이 모셔두었던 것 같다. 나름 귀한 음식이라 판단, 아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새 선물이라는 존재마저 잊혀졌고, 문득 생각이 떠올라 뒤늦게 이를 활용하려 나섰으나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시쳇말로 아끼다 똥 된 셈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생활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껴 먹는다며 보관해 두거나, 혹은 장모님이 보내오신 양파즙처럼 한동안 잊은 채 방치하다가 정작 먹을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내다 버린 먹거리들이 즐비하니 말이다. 이러한 사례가 비단 음식뿐이겠는가? 결과적으로 볼 때 이는 아낀다고 아끼는 게 아니다. 쓸 데 없는 집착이 오히려 예상치 못한 낭비를 초래하는 경우이다. 조금 넓게 보자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거나 저당 잡혀야 하는, 기성세대가 살아온 이러한 뻔한 방식의 삶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젊은 세대들의 삶의 양태인 '워라밸'과 '욜로'가 추구하는 가치도 이와 맞닿아 있다. 한 마디로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 행복해지자는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들먹이며 우리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놓고 맛있는 것부터 먹는 경우와 맛없는 것부터 먹는 경우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논의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이 대목에서 진지해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일종의 찍먹이냐 부먹이냐 따위와 비슷한, 취향에 관한 사안인 까닭에 이에 지나치도록 진지한 접근은 되레 잉여력만 상승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맛있는 것부터 먹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반대의 경우는 앞서 들었던 나의 사례처럼 일종의 집착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 년 만 년 살 것도 아니건만 우리는 왜 이토록 사소한 것에 집착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앞으로는 귀한 것일수록 아끼기보다 오히려 빨리 소비하고 활용하려는 습관을 들이도록 노력해야겠다. 아울러 장모님께서 정성스레 만들어 보내주신 먹거리 또한 재빨리 먹고, 소비하는 것이 결국 당신의 정성과 사랑에 보답하는 지름길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난 지금 당장 행복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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