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무민세대의 지향점,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새 날 2018. 1. 2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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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SBS 프로그램인 '불타는 청춘'을 시청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중년을 넘어 어느덧 장년을 바라보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이른바 '신중년'에 해당하는 비슷한 연령대의 남녀 연예인들이 함께 모여 장을 보거나 밥도 해먹고 시간을 소일하는 지극히 단순한 내용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왠지 사람의 시선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넋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이를 시청하다 보면 밤12시가 훌쩍 넘어가곤 한다. 


어제는 강수지가 대마도에서 바다 낚시를 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바다 낚시의 자칭 고수 이하늘은 정작 허탕을 치는 사이 완전 초짜 강수지는 귀한 돔을 두 마리나 잡는다. 뿐만 아니다. 물살이며 바람의 세기 등 어느새 강태공쯤 되어야 알 법한 지식은 물론, 낚시를 위한 최적의 환경까지 터득해 가고 있었다. 강수지는 이렇게 말한다. "낚시를 하다 보면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찌만 바라보게 돼" 이래서 사람들이 낚시에 빠져드는가 보다며 낚시 예찬론까지 읊는다. 이쯤 되면 낚시 DNA를 제대로 타고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프로그램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강수지가 낚시를 하며 체득했을 법한 비슷한 감정 따위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고기를 낚으며 무념무상에 빠진 채 오히려 시간을 낚게 되듯이 나 역시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어느 순간 아무런 생각을 않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대리만족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도 넋을 놓게 한 또 다른 연유였을는지 모른다. 



아마도 요즘 이런 류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요인은 주변에 나처럼 무념무상을 통해 위안을 얻으려는 부류의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일 테다. 세상사가 하도 복잡다단하기에 이로부터 의도적으로 단 하루라도 탈출하고자 하는 '멍때리기' 시합 같은 이벤트가 인기를 끄는 것도 비슷한 맥락 아닐까? 그러고 보니 올 한 해를 관통할 신조어로 '무민세대'가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여기서의 '무민'은 없다는 뜻의 무(無)와 영어로 의미를 일컫는 민(mean)을 합친 합성어다. N포세대로 불릴 정도로 젊은 세대를 둘러싼 환경이 녹록치 않으며 혹독한 삶의 여건 속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람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아무나'가 되고 싶다는 '노멀크러시' 열망과도 맞닿아 있다. 


ⓒSBS


무민세대는 자극이 없으며 이해관계도 없는, 말 그대로 아무런 의미 없는 행위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이를테면 상대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르는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탓에 일부러 의미 없는 선물을 하곤 하는 방식이다. 누구나 찾길 원하는 여행지를 다니거나 일부러 맛집을 찾아다니는 수고로움 따위는 일절 하지 않는다. TV속 연예인들이 편안하게 일상을 즐기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고, 세상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이를 좇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세상이다. 게다가 정치는 뭐가 그리도 혼탁한지,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을 놓고도 이전투구를 벌이는 그들만의 리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역겨운 데다가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이들로부터 애써 도망가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근래엔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멍 때리는 데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할 정도로 세상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젊은 세대들을 힘들게 한 데는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잘못이 크다. 그래서 노멀크러시가 되려 하고 무민세대로 살아가려는 그들의 몸부림이 어떤 측면에서 보면 무척 안쓰럽다. 삶의 변화를 바라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의 자조적인 분위기가 더욱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민세대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는 젊은 세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강수지가 낚시를 하며 무념무상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녀의 낚시 장면을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얻고 무념무상에 빠져든다. 유독 이 프로그램에 집중한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를 시청하는 데엔 젊은 세대들의 열망과는 그 방향성이 조금은 다를지 모르나 적어도 이 복잡하고 정신없는 세상사를 잠시라도 잊고 싶은 간절한 바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일맥상통하리라 생각된다. 


내 눈에 비친 세상을 이야기하고, 소소한 일상을 토로하는 이 블로그 글을 쓰는 일조차 요즘 같아서는 솔직히 그냥 조용히 내려놓고 싶다. 물론 이에는 글을 쓰게 하는 유인과 원동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한 몫 단단히 거든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냥 글쓰는 일 자체가 싫고 귀찮다.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싫다. 글을 쓰려면 생각을 해야 하고 이를 정리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냥 무념무상인 상태를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얼마 전 유해진의 광고 가운데 '난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는 카피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카피가 인기를 끈 요인도 알고 보면 작금의 무민세대 부각과 비슷하다. 힘들고 복잡한 세상사를 잠시 잊고 멍 때리고 싶다는 현대인들의 열망이 드러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지금은 당시보다 더욱 복잡한 세상이 돼버렸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어느덧 인간의 제어 가능한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이를 좇는 일만으로도 벅차고 정신이 없다. 무민세대가 추구하는 삶의 태도, 이는 비단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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