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치란 말야

세계 최초의 드론 인명구조와 기술의 가치판단에 대해

새 날 2018. 1. 1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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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은 애초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도구다. 실제로 군사 충돌 현장이나 테러 집단에 대한 응징 등 사람의 직접적인 접근이 곤란한 지역에 이를 띄워 폭탄을 투척하거나 요격 암살을 실시하는 용도로 많이 활용된다. 하지만 근래엔 그 쓰임새가 놀랍도록 다변화하고 있다. 가장 많이 활용되는 영역은 방송사 등 주로 영상을 다루는 곳일 듯싶다. 하늘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예전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헬기를 띄워야 했으나 근래엔 드론을 이용해 간단히, 그리고 저렴하게 이를 해결한다.


택배 영역에서의 활약도 기대되는 바다. 아마존은 향후 드론을 통해 30분 배송 보장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한다. 복잡한 도로 위가 아닌 광활한 공간을 자유롭게 활강하며 드론 스스로 배송지를 찾아 택배 물건을 내려놓고 떠나는 첨단 서비스다. 이렇듯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생활을 더욱 더 풍요롭고 편리하게 해준다. 하지만 드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서비스는 정작 따로 있는 것 같다.


호주 해변에서 파도에 휩쓸린 10대 두 명이 드론 덕분에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수영을 하던 이들이 3미터의 파도에 휩쓸려 익사 직전의 상황에서 해안 구조대가 날려보낸 드론에 의해 구명장비가 떨어뜨려졌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드론이 구조 현장에 도착해 구명 장비를 떨어뜨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70초에 불과했다. 구조대원이 직접 현장에 투입될 당시 걸린 시간 6분과 비교하면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골든타임과 엮인 터라 엄청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드론이 바다에 빠진 사람을 직접 구조한 사례는 세계 최초의 일이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렇듯 인명 구조로써의 쓰임새는 드론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데 있어 최적의 사례 아닐까 싶다. 드론의 애초 탄생 배경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되레 살리는 용도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의 발달이 드디어 유토피아라도 만들어낸다는 의미일까? 


하지만 달콤함에 빠져들기엔 아직 성급하다. 애초 탄생 목적 그대로 택배 드론처럼 소리 소문 없이 날아들어 인명 살상을 자행하는 고급 살인 병기로 둔갑되어 사용될 우려는 여전히 상존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드론이 일으키는 공해도 생각보다 심각하다. 취미가 됐든 아니면 업무적인 용도가 됐든 근래 드론 이용자가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철새 떼와 충돌하는 등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일이 잦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호주 아이들을 구조한 드론


이렇듯 기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과학기술은 그 속성상 아무리 선량하고 올바른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해도 그 결과를 완벽하게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위협적인 요소가 언제든 나타날 가능성마저 상존한다는 사실은 자못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4차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작금의 기술 발전 속도는 안타깝게도 이미 인간이 제어 가능한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폭주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대체로 두 갈래로 갈린다. 


일상이 굉장히 풍요롭고 편리해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있는 반면에 인간의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질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낙관론자들이 흔히 내세우며 강조하는 건 다름 아닌 과학기술은 언제나 가치중립적이라는 사실이다. 과학기술은 절대로 가치판단 따위에 관여하지 않으며, 아니 할 수 없으며, 오로지 객관적인 진리만을 추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류에게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하고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고 해도 이는 결코 기술의 책임일 수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최근의 기술 발전 속도는 폭주 수준에 가깝고 덕분에 예측마저 무의미해지고 있다. 과거 기술 수준의 잣대에 맞춰 단순하게만 바라볼 사안은 아니라는 뜻이다. 독일의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본래의 속성이었을지도 모를 객관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작금의 과학기술 작동 원리는 이제 더 이상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탐구 정신에 입각하여 설명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과학기술을 움직이는 힘은 결국 자본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결과 역시 자본에 귀속된다." 


이는 알고 보면 참 무서운 표현이다. 물론 모르고 봐도 무섭기는 매한가지다. 과학기술마저 자본에 예속됐으며, 때문에 낙관론자들이 언급하는 것과 같은 순수성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아울러 객관성이라는 고유의 가치마저도 이미 잃어버렸다는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의 윤리적 책임을 유독 강조하고 나선 그다. 요즘처럼 첨단기술시대일수록 더욱 분명한 책임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일리 있는 주장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시대일수록 이의 발달 과정에서 수반되는 수많은 윤리적 문제들을 이해하고,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기술이 삶의 양태를 완전히 뒤바꿔놓기 전에 기술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과 관련하여 확실히 선을 그어두는 게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선택 가능한 미래'의 저자  비벡 와드와와 알렉스 솔크에버이는 기술을 아예 '형평성' '위험성' '자율성'이라는 세 가지 잣대에 의해 하루빨리 평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드론을 이용한 세계 최초의 인명 구조 장면은 드론에 대한 명백한 새로운 가치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바다에 빠진 호주 10대들을 드론이 구조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내심 흡족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보통신기술과 SNS의 발달이 수많은 관심종자들을 양산, 이로 인한 폐해가 어느덧 위험 수위에 도달한 상태이고, 4차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꼽히는 블록체인과 관련한 이슈가 최근 부작용을 일으키며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는 등 일각에서 우려하던 대로 첨단과학기술이 빚어내는 결과 및 그의 부산물의 일부가 통제 가능한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은 가치중립적이기에 해당 영역에 가치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일절 없다며 이를 외면하는 게 옳을까? 아니면 작금의 폭주하는 기술 발전 앞에서 그나마 제어가 가능할 때 과학기술의 윤리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하는 게 옳을까? 여러분들의 생각은 과연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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