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건배사 꼭 해야 하나요?

새 날 2017. 12. 11.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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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란 술좌석에서 축하하거나 건강 또는 행복을 빌기 위하여 술잔을 들어 마시는 일을 일컫습니다. 원래는 신에게 바친 신주로 건배하고, 죽은 사람에 대하여 행하는 종교적 의례 가운데 하나였으나 최근에는 서로를 축복하는 의미로 행해지곤 합니다. 이때 건배를 제의한 이가 건배에 앞서 건네는 말을 건배인사말 또는 건배사라고 합니다. 


어느새 다시 돌아온 연말입니다. 시간 참 빠릅니다. 바야흐로 송년회 시즌이자 술자리 및 건배사의 계절이기도 한데요. 이러한 연유 탓인지 요즘 음식점에 앉아 있다 보면 각종 단체나 직장인들의 회식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단체석에서는 연신 '위하여'라는 구호와 함께 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수 회 반복되는 걸 보면 아마도 회식에 참석한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건배를 제의하고 또 건배사를 외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술자리가 친구 관계처럼 이해관계의 얽힘 없이 말그대로 순수한 친분에 의해 마련된 자리라면, 더구나 회식 참석 당사자 스스로가 원해서 모인 자리라면 더 없이 즐거울 테고 건배 제의 또한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업 조직처럼 일종의 위계질서에 의해 마련된 술자리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일단 술자리가 싫거나 이를 원치 않더라도 반강제로 회식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테고요. 술잔을 돌려가며 음주를 강권하는 사례도 여전한 것으로 읽힙니다. 시대가 변모하고 사회 구성원이 바뀌어도 이러한 문화는 일종의 전통입네 하며 그 명맥을 질기도록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싫은 이들에게는 이만저만한 스트레스가 아닐 텐데요. 더불어 최근엔 갈수록 진화하는 건배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직장 상사의 건배사를 시작으로 아래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건배사를 읊고 잔을 부딪히는 모습은 한국식 음주문화 토양에서는 아주 흔하디흔한 광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 독특하고 센스 있는 건배사를 동료들 앞에서 선보여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연말연시는 그래서 아주 곤혹스럽기만 합니다. 


온라인에는 건배사 잘하는 방법부터 '센스 있는 건배사로 연말 술자리 주인공 되기'까지 등 온갖 관련 콘텐츠들이 즐비합니다. 건배사를 모아놓은 도서가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으며,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도 관련 콘텐츠를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덧 건배사는 대중들에게 주요 관심 영역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왜 아닐까 싶습니다. 통통 튀는 자신만의 재치를 뽐내는 건배사 한 마디로 회식 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변모시킬 수 있고, 자신만의 강렬한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도 있으니 어쩌면 윗사람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고 점수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와 닿을 수 있겠지요. 


ⓒ농민신문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을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가 지난해 직장인을 대상으로 건배사와 관련하여 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그 결과 건배사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의 비율이 51%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건배사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셈인데요. 


최근 모 병원에서 장기자랑을 진행하면서 간호사들로 하여금 강제로 걸그룹 댄스를 선보이게 하여 조직의 강압적인 문화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바 있습니다. 노래를 못하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사람에게 강제로 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춤을 추게 하는 행위는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스트레스이자 고통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게 술자리 참석을 강요하거나 별로 마시고 싶지 않은데 잔을 돌려가면서 음주를 강권하는 행위 역시 스트레스 그 이상일 수 있습니다. 조직만이 갖추고 있을 법한 위계질서를 이용해 개인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하는 일종의 강압 행위는 이제는 지양돼야 할 문화 아닐까 싶습니다.



무언가 분위기를 살려야 한다는 절실함과 의무감 때문에 직장인들에게 건배사는 즐거움이 아닌 고통으로 다가오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고충을 호소하는 이들이 과반을 넘고 있습니다. 애시당초 회식 문화 자체가 구태의연한 우리의 음주문화의 한 갈래일 수 있고, 그러다 보니 건배사 또한 자연스럽게 스트레스화되어 우리에게 전가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직의 화합과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개인을 희생시키는 건 과거 산업화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문화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 건배는 참석자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빌기 위해 건배사를 통해 이를 기원하며 술잔을 들어 마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과 축복을 바라는 과정과 결과물이 정작 누군가에게는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불행을 야기할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상사를 기쁘게 하고 회식 분위기를 부드럽게 한다는 미명 하에 여전히 성행하고는 있으나, 이렇듯 직장인들의 애환과 고충이 가득 배어있는 건배사, 꼭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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