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우리 삶에는 적당한 쉼표가 필요하다

새 날 2016. 10. 2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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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늦는다고 연락해야 하니 휴대전화를 찾아달라"


김포공항역 사고로 숨진 이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다. 그의 나이 올해로 36세다. 한 가정의 가장일 것이라 짐작되는 데다 회사 내에서도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핵심 인력으로 활약하고 있을 연령대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안위와 가족보다는 회사 일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 그의 행동과 이로 인한 결과가 안쓰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이 몹시 언짢다. 왜 그는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안부를 묻기보다 회사 일부터 걱정해야 했던 걸까? 도대체 왜?


물론 사고를 당한 입장이라 그의 신체와 정신은 온전치 못했을 테다. 이는 서두에서 언급한 그의 발언이 무의식 중에 나온 것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전후 사정과 정황으로 파악해 볼 때 사고 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회사 및 일과 관련한 사항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숨진 그가 평소 누구보다 애사심이 강하고 맏형 같이 동료들을 챙겨주었다는 회사 동료들의 말을 그대로 입증해주는 대목이라며, 엘리트 직장인이라는 호칭을 부여, 그를 한껏 치켜세우고 있었다. 


ⓒ서울신문


언론의 이러한 다독임이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조금이라도 위안으로 작용하게 된다면 나인들 이를 만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 왠지 작금의 언론 반응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그 순간조차 회사 일만을 걱정해야 하는 이 지독히도 잔인한 현실 앞에서, 언론 매체가 이를 애사심으로 포장하는 게 과연 온당한 걸까?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우린 흡사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양 여전히 앞만 보고 내달리는 와중이다. 그런데 그 앞이란 녀석은 늘 한결 같다. 무한경쟁, 아울러 갈수록 불평등해지는 사회 구조가 우리를 단방향으로 더욱 가열차게 몰아세우고 있는 모양새 아닌가. 


이르면 유치원 무렵부터 시작되는 경쟁 시스템은 평생을 두고 곁을 배회하며 우리를 괴롭힌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오로지 좋은 학교의 진학을 목표로 너 죽고 나 살기식 경쟁 랠리가 펼쳐지고,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취업절벽이라는 생존 위기와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며 스펙 쌓기에 온몸을 불사르기 일쑤이다. 하지만 진짜 경쟁은 사회에 진출한 이후부터다. 성과와 승진을 위한 무한경쟁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단 한순간도 쉼이 없는 구조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무한경쟁 시스템은 객관적인 수치로도 입증된다. OECD가 발표한 '2016년 고용동향'에 따르면 우리나라 취업자 1인당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OECD국가 중 2번째로 긴 것으로 나타났다. CNN은 한국인의 특징적인 것 중 하나로 ‘일중독’을 꼽고 있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무려 79.4%에 이르는 직장인이 ‘번아웃 증후군’을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모두가 일의 성공 혹은 부의 축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한질주 중이라는 의미이다. 성공을 바라며 죽자고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셈이다. 물론 가속 페달 옆에 응당 있어야 할 브레이크 페달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는다.


흔히들 세속적인 성공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일컬어 '노오력'이 부족한 것이라 폄하하곤 한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친 한국 사회는 일종의 질병인 일중독을, 그러니까 '노오력'을, 마치 대단한 미덕인 양 포장한 채 이를 권장해왔다. 물론 이러한 과정 덕분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 세계 10위권의 경쟁력 있는 국가로 발돋움한 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압축 고도 성장의 피로감이 현재 우리 경제 전반의 발목을 잡으며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듯, 개인의 '노오력'도 이젠 한계 상황에 봉착했다.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범주의 거의 끝자락인 임계치에 도달한 느낌이다.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은 세계 최장에 가깝지만 반대로 생산성은 최저 수준이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비대칭적인 사실이 우리의 '노오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입증한다.


ⓒ국민일보


셀리에는 스트레스의 과정을 경계반응, 저항단계, 소진단계의 3기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일중독 현상이 과할 경우 번아웃 증후군처럼 일시에 모두 타버리며 셀리에가 언급한 마지막 단계인 소진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미증유의 각종 어려움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한데 얽혀 발현된 탓도 크지만, 모두가 무한경쟁 속에서 한결 같은 성공만을 바라며 단방향을 향해 달려온 데다가, 이러한 결과 덕분에 어느덧 모든 것이 불타 없어져버린 소진된 상태가 된 연유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언론 매체들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회사 일을 염려하는 현상 앞에서 그를 향해 ‘열정적인 사람’ ‘일 잘하는 사람’으로 미화하며 여전히 우리 모두를 소진사회로 내몰고 있다. 


일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이른바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우리는 이를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그의 반대급부로 더 많은 것을 희생시키곤 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기회비용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든 일에만 오롯이 몰두하다 보면, 그의 대가로 반려자와 자식 그리고 친구, 심지어 자신에게마저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금전적인 측면에서는 성공한 것일지는 몰라도 인생 전체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결코 성공한 게 아닌, 공허함만 안겨주는 꼴이 되고 만다. 이제 우리의 삶에도 균형 감각이 절실해졌다. 


언론 매체는 힘들어하고 지친 사람들을 다독이기보다 암암리에 소진사회를 미화하며 그러한 상황으로 자꾸만 내모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사람 역시 기계와 다르지 않다. 쉴 때 쉬지 못하면 언젠가는 방전되어 완전히 소진되고 만다. 우리 삶에도 적당한 쉼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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