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그래, 난 아재다

새 날 2016. 9. 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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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텔레비젼을 보면 말이지..."


이 한 마디에 주변은 온통 술렁이기 시작한다. 혹시 내가 말을 잘못 꺼내기라도 한 걸까? 소심했던 난 당황한 나머지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며 유심히 귀를 기울인다.


"얘들아, 텔레비젼이래, 텔레비젼.. 큭큭~"


그러니까 요는 이랬다. TV를 텔레비젼이라 표현했던 게 아이들에게는 영 어색하고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멀쩡한 말들도 줄여 사용하거나 초성으로 표현하기 일쑤인 요즘 아이들이거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혀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뭐든 빨라야만 하는 아이들에게 있어 텔레비젼이라는 용어는 너무 장황한 표현 그 자체였을 테니 말이다.


이후 아이들은 내게 본격적인 '아재' 감별을 시도해 왔다. 물론 재미삼아 툭툭 내던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익히 모르는 바 아니었고, 아울러 난 그런 녀석들이 너무도 귀여웠기에 모른 척 전부 받아 주었다.


ⓒ봉봉


"'프사'가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본들 이렇듯 새로운 용어가 내 머릿속에서 떠오를 턱이 없었다.


"어머, '프로필 사진'도 모르세요? 진짜 아재인가 봐 깔깔깔~"


그러던 어느날, 이번엔 조금 더 고차원적인 질문을 해 온다. 네 자로 된 초성 조합의 용어인데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해당 테스트는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아재 판별을 위해 공식 활용됐었노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있었다. 난 순간 긴장 아닌 긴장을 해야 했다. 일단 네 자의 초성은 단순한 말줄임보다 난이도가 높아 보였고, 더구나 아재 판별용으로 공중파 방송에서까지 언급됐다고 하니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난 나름의 촉을 믿고 있던 터라 다른 한편으로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 역시 요즘 아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ㅇㄱㄹㅇ"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려 본다. 하지만 쉽게 떠오르지를 않는다. 답답해 하던 아이들이 친절하게도 대표적인 오답의 예를 제시해 준다. 사례처럼 답하는 사람은 백퍼센트 아재라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 그래요' 혹은 '안 그래요' 따위의 답들 말이다. 


"........"


시간이 제법 흘렀다. 답답해 하던 아이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들 힌트를 제시하기 시작한다. 


"'ㄹㅇ'은 '레알'이란 의미예요"



그래도 모르겠다. 내겐 너무 가혹한 고문이었다. 나의 답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아이들이 자신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누구랄 것도 없이 답을 술술 말하기 시작한다. 


"이거레알"


허무했다. 솔직히 이런 류의 용어를 내가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나. 하지만 아이들의 짓궂은 아재 감별은 계속된다.


"ㅂㅂㅂㄱ"


흠.. 도대체 이건 무언가. 다행히 아이들이 마지막 글자를 알려준다.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이번엔 왠지 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어느 때보다 자신있게 말한다.


"반박불가"


정답이었다. 하지만 고난이도의 문제를 해결할 때면 으레 느껴질 법한 뿌듯함보다는 무언가 정체 모를 허무한 감정이 먼저 밀려든다. 거울 앞에 선다.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 무수한 점과 검버섯 따위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상하다. 오른쪽 요 점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없었는데.. 미간 사이의 주름은 굳어져 얼굴 전체의 윤곽을 팍팍하게 그려내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 봐도 영 어색하기만 하다. 


머리카락은 또 어떤가. 한때는 너무 숱이 많은 데다 돼지털처럼 뻣뻣한 현실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는데, 훌쩍 지나버린 세월은 내 이마의 면적을 지속적으로 넓혀 왔고, 그 많던 숱은 또한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건지, 휑해진 머릿속을 바라보며 현저히 줄어든 밀도를 걱정해야 할 상황인데다가 한 올 한 올의 머리카락은 왜 그리도 가늘고 힘이 없는 건지..


ⓒ봉봉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이날따라 신기하게도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 중에서도 2,30대로 보이는 청년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관찰해 본다. 적어도 지금 주위에 있는 청년들 중 티셔츠나 와이셔츠 안으로 속옷을 받쳐 입은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결 같이 속옷 없이 겉옷을 걸쳐 입은 상태였다. 하긴 우리 애들도 평소 상체에는 속옷을 입지 않으니 이러한 옷차림이 요즘의 트렌드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긴 한다. 난 365일이 멀다 하고 매일 속옷을 받쳐 입고 다녔는데.. 


그래서 어제는 나도 과감히 벗어 봤다. 그런데 그 얇은 한 겹의 옷이 뭐라고, 입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이토록 크게 차이 나다니, 왠지 더 추운 느낌인 데다가 배까지 살살 아파올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아닌가. 젊은 애들 흉내를 냈다가는 자칫 몸이 먼저 거부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다시 꺼내 입고 만다. 이렇게 따뜻하고 좋은 걸 젊은이들은 도대체 왜 안 입는 걸까. 


그래, 난 어쩔 수 없는 아재였다. 인정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해수욕을 하러 갈 때 웃통을 벗고 들어가는 것보다 웃옷을 걸치고 물에 들어가는 일이 편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난 이미 아재였던 셈이다.


그래, 난 아재다. ㅂㅂㅂㄱ ㄹㅇ 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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