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그냥 색칠을 하고 싶을 뿐이다

새 날 2016. 9. 1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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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막내 녀석 참고서를 사기 위해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서점에 들렀다. 아침 시간대라 그런지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아 여유로운 편이었으며, 덕분에 쾌적한 환경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원하던 책을 골라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려던 찰나다. 곁에는 가장 인기 있다고 하는 책들을 별도로 전시해 놓은 코너가 있었는데, 우연히 한 권의 책에 눈길이 닿았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카카오프렌즈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책이었다. 대부분은 비닐 커버로 씌워져 있어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견본 책이 있었다. 


거들떠 보니 색칠 책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색칠 책이 어른들에게 유행이란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도 계기는 지난해 종영됐던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등장, 일약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며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비밀의 정원'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이후 해당 제품과 색연필 등 색칠 도구를 한데 묶어 패키지화한 제품이 인기리에 판매됐던 적이 있다. 그런데 예스24 9월 1주와 2주차 베스트셀러 순위에 컬러링북 '헬로, 카카오프렌즈' 등이 다수 올라와 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됐다. 그러니까 동네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비치된 색칠 책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뉴스1


솔직히 말하자면 비밀의 정원과 수십 가지의 색상으로 이뤄진 색연필 도구는 나 역시 탐이 나던 물건 중 하나다. 당시 유행할 때 한 세트를 장만하려던 생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처럼 그냥 머릿속에서만 머문 채 금세 잊혀졌던 물건이기도 하다. 이를 구입하고 싶었던 건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밑그림에 형형색색의 색연필로 칠을 하다 보면 복잡한 세상사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비밀의 정원' 책자의 부제도 안티-스트레스 컬러링북이었다. 애초 해당 책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 역시 치유의 목적임을 숨기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근래 이러한 색칠 책뿐 아니라 가위로 오리고 잘라 붙여 만드는 꾸밈책, 그리고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나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를 재해석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의 상위를 차지하고 있단다. 이 현상의 배경엔 문화 전반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키덜트' 현상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다. 성인책의 어린이책화 역시 그의 연장선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정신적 퇴행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전문가의 우려 섞인 반응도 엿볼 수 있다. 그러니까 팍팍한 현실 속에서 어린 시절 즐겼던 놀이를 통해 스트레스를 없애려는 현상 중 하나라는 관점인 셈이다. 혹은 SNS에 컬러링이나 꾸밈책의 완성작을 올리고 지인 등으로부터 관심을 불러일으켜 인정을 받으려는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분석도 있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각종 재난을 경험하면서 그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사회 안전망 붕괴 현상을 몸소 경험하고 있는 개인들이 심리적 피난처를 찾으려는 현상 중 하나이며, 이를 성인의 아동화 내지 문화적 퇴행으로 받아들이는 전문가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현실속 삶 자체가 워낙 끔찍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 제기가 담긴 책을 읽기보다는 가위질이나 색칠 그리고 스티커 붙이기를 하며 복잡한 세상사를 잊으려는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비교적 안전했던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상처 받은 마음에 위안을 얻고 심리적 피난처에 빠져들고 싶어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문가들의 분석이나 주장이 결코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실제로 색칠을 하는 동안만큼은 왠지 이 복잡다단한 삶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나있는 느낌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보호 받지 못하는 현실로부터 일종의 피난처를 갈구하는 행위일 수도 있겠고, 아울러 비교적 안전했다고 생각하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경을 간절히 표현하는 행위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전문가의 묘사처럼 복잡하고 끔찍한 현실에 대해 아예 들여다보고 싶지 않거나 생각조차 하기 싫어 발현되는 정신적 퇴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이래나 저래나 그림을 보며 무언가 편안함을 얻을 수 있고, 무념무상 상태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이유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은가? 어른이라고 하여 마음 속에서 늘 본능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어린 아이의 감성을 애써 억누를 필요가 있을까? 그냥 그림을 보며 스티커를 붙이고 가위로 오리거나 색연필로 색칠하는 그 자체로 마음이 치유된다는데 여기에 무슨 정신적 퇴행이니 문화적 후퇴와 같은 거창한 의미 부여가 필요한 걸까? 


ⓒ파이낸셜뉴스


혹시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에겐 굳이 무언가 그럴 듯한 해석을 붙여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라도 있는 게 아닐까? 베스트셀러라고 하여 반드시 고도의 사회적 담론이며 이슈, 복잡하고 심각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도서여야만 할까? 색칠을 하거나 그림책을 보며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행위가 어째서 유치한 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하나? 누군가에게는 둘도 없는 소중한 취미이자 행복한 시간, 아울러 자신을 돌아보는 진정한 기회일 수도 있을 텐데? 성인들의 새로운 놀이나 문화적 현상에 대해 굳이 가치를 비교해 가며 우열을 매기는 일이야 말로 정말로 영양가 없으며 의미 없는 행위 아닐까?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고, 색칠을 하고 싶고, 또한 자르고, 붙이고 싶어 하는 행위일 뿐이다. 여기에 무슨 의미 부여가 필요한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토도 달지 말 것이며, 제발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들이 현재 하고 있는 그대로 놔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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