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백색 가운

새 날 2016. 9. 4. 17:55
반응형

흰색 하면 순결, 순수, 숭고, 정직, 계몽, 깨끗함, 단순함, 보호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다. 인간의 인식 및 사고 유형을 6색상의 모자로 설명한 드 보노라는 학자에 따르면 흰색을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로부터는 아무 것도 칠해져 있지 않은 매우 깨끗한 원초적 상태의 흰색 종이 한 장을 떠올림직하다. 


흰색이 지닌 고유한 상징성은 직업 세계에서도 유효하다. 위생과 깨끗함의 대명사격인 의사의 가운이나 반도체 생산공정에 몸 담고 있는 종사자 그리고 조리사의 복장은 한결 같이 흰색 일색이기 때문이다. 물론 약사나 수의사 등도 흰색 가운을 걸친다. 생각보다 많은 직업이 그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철저한 위생이 뒷받침되어야 하거나, 고도의 기술 집약이 요구되는 산업 현장에서 이처럼 굳이 흰색 가운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얼까? 아무래도 흰색만이 지니고 있을 법한 상징성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하이닥


간호사를 의미하는 '백의의 천사'라는 표현 속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엿볼 수 있다. 색상 고유의 상징성에, 제복이 지니고 있을 법한 환상이 함께 결합되다 보니 보다 강력한 상승효과를 뿜어내게 된다. 직접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간접적인 체득에 의한 것이든 관계 없이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직업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환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드물지 않은 건 다름아닌 이러한 연유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근래 이러한 환상을 깨뜨리는 사례가 잦다. 무면허 의료 행위가 만연하고 있어 주의가 요망된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사기 행각과 무면허 침술, 문신 시술, 성형 수술, 치과 치료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고 간편한 치료를 무기로 무면허 치료 행위가 우리의 일상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양상이다. 사실 이는 심각한 범죄다. 무엇보다 국민 건강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행위인 까닭이다. 


아울러 이들의 엉터리 시술로 인해 의료 서비스에 대한 신뢰 또한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들은 의료인이 아니다. 때문에 그나마 비의료인이 의료인의 흉내를 내면서 그들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경우에 해당하지만, 심지어 의료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신뢰를 직접 좀먹는 사례도 간혹 접하게 된다. 함께 일하는 간호조무사에게 부원장 직함을 주고 흰색 가운까지 입혀 마치 의사인 양 수술 등의 처치 업무에 참여시킨 전문의가 적발된 사례가 바로 그에 해당한다. 



전자의 경우 애시당초 환자가 이들이 무면허 업자라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고 환자 자신의 신체를 맡긴 사례에 해당하나, 후자의 경우 의사 스스로가 자격이 없는 간호조무사를 이용, 의사인 양 행세케 하면서 시술 행위에 직접 가담시켜 부당 이득을 취한 사례이기에 이는 불특정다수를 감쪽 같이 속인 행위에 다름아니다. 그러니까 의사라 생각하고 기꺼이 우리의 신체를 맡겼으나 결과적으로는 자격이 전혀 없는 간호조무사로부터 의료 시술을 받은 셈이 된다. 이는 의료인 스스로가 의료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신뢰를 저버린 경우이기에 동료 의료인들에게까지 막대한 피해를 끼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병원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을 응당 의사라 생각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우리의 신체를 그에게 맡긴다. 그가 실제로 의사이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흰색 가운이 만들어낼 법한 상징체계가 정상적으로, 그리고 원활하게 작동하고 있는 한 그렇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은 당연히 의사여야 할 테고, 우리는 이에 대해 추호의 의심을 할 턱이 없다. 그러나 의사가 아니면서 의사인 척 감쪽 같이 우리의 눈을 속인 뒤 시술에 직접 참여하는 황당한 사례가 자꾸만 벌어진다면 굳건했던 상징체계 및 신뢰는 조금씩 무너질 수밖에 없다. 


흰색과 제복이 만나 흰색 가운이라는 유형 무형의 상징을 만들어 왔고, 그동안 대중들은 추호의 의심 없이 이를 신뢰해 왔건만, 극히 소수에 불과한 의료인의 일탈 행위로 인해 굳건하던 상징체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셈이다. 무면허 시술이 의료 서비스를 교란시킨 행위라면, 이는 그에 더불어 의료인이 직접 환자를 기만한 데다가 의료인에 대한 신뢰마저 와르르 무너뜨리는 원죄를 더하게 됨으로써 질적으로 더욱 좋지 않은 결과를 빚고 있다. 자칫 흰색 가운을 향한 대중들의 동경과 환상마저 산산조각나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심히 우려스럽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