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막연히 꿈꾸던 귀농 귀촌, 다시 생각해 보다

새 날 2016. 6. 1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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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이든, 아니면 농촌이나 어촌 혹은 산촌 등의 시골 출신이든, 이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누구나 꿈꿀 법한 게 한 가지 있다. 다름아닌 귀농 내지 귀촌이다. 물론 고향이 도시인 사람이 귀농이니 귀촌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건 사실 어법에 잘 맞지 않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도시 출신들에게는 사실상 언제고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시골이란 물리적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농 귀촌이라는 용어에는 유턴뿐 아니라 일종의 전원생활을 꿈꾸는 도시인들의 소박한 희망까지 담긴 광의의 개념으로 봐야 함이 옳을 것 같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라고 하여 그러한 로망이 없을 리 없다. 사실 집사람과 나는 예전부터 아이들 다 키우고 나면 작은 텃밭을 가꾸며 자급자족이 가능한 곳에 내려가 살자고 입버릇처럼 되뇌어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쌀은 직접 재배하기가 곤란하니 이는 구입하여 해결하고, 나머지 반찬거리가 될 만한 야채나 채소 등을 텃밭에서 가꿔 자급자족하자는 계획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먹거리는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고 일상 생활은 각자 좋아하는 취미 생활과 함께할 수 있는 일거리, 놀거리로 소일하며 조금은 느긋하게 살아보자는 게 나름의 꿈이다. 


ⓒSBS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도시에 사는 사람치고 주변에서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싶다. 각박한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의 다수는 지금 이 시각에도 귀농 귀촌이라는 막연한 로망을 꿈꾸고 있지 않을까? 실제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얘기는 술자리의 단골 메뉴다. 술이 다 깬 뒤면 우리가 언제 그런 류의 이야기를 나누었냐는 듯 싹 잊곤 하지만, 어쨌거나 적어도 술자리에서만큼은 무슨 놈의 의리가 밥 먹여준다고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입지 좋은 곳에 함께 집을 지어 텃밭도 가꾸고 술도 함께 마시며 재미나게 여생을 보내자고 약속하곤 한다. 


얘기를 주고 받다 보면 어느새 구체적인 지역과 입지 조건까지 들추어내기 일쑤다. 이를테면 반드시 대형병원이 근처에 있어야 하며, 서울과 너무 먼 곳이 아니어야 하고, 너무 덥거나 추운 지역이어선 절대로 안 된다는 등의 나름의 까다로운 조건들이다. 물론 이런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 과연 우리를 위해 남아있을지는 미지수인 데다가 혹여 있다고 해도 누구나 비슷한 조건을 찾는 터라 쉽게 구해질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우린 그저 상상의 날개를 펴는 일만으로도 그 순간만큼은 최고의 행복감에 빠져들곤 한다. 마치 실제 여행을 하는 일보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이 더욱 설레고 행복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울러 '난 나중에 크면 이런 집에서 살 거야' 따위의 동심과도 견주어질 정도로 일종의 판타지에 가깝다.


한편, 귀농 귀촌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선 익히 들어온 터라 낯설지 않다. 그 중에서도 현지인들의 텃세 등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느껴 중도에 이를 포기하고 도시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말을 흔히 듣곤 한다. 준비 없는 막연한 도전은 필패일 수밖에 없다는 세간의 흔한 격문 따위가 귀농과 귀촌에도 여지없이 들어맞는 셈이다. 이러한 현실을 오히려 장삿속으로 역이용하는 사람들도 근래 부지기수다. 그만큼 이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거니와,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늘 나만은 다를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기 십상이다. 즉, 나의 귀농 계획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다.


그러나 최근 실제로 귀농의 꿈을 이룬 지인을 통해 전후 사정을 직접 전해들은 뒤로는 생각이 적어도 개미 눈곱만큼은 변했다. 정말로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실감케 된다. 더구나 이분들은 무늬만 귀농이 아닌, 자신들이 태어난 곳으로의 유턴이었음에도, 아울러 재산 등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부족함 따위가 전혀 없었음에도 어려움을 호소해오던 찰나다. 서울에서 벌여놓은 사업이 성공하여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은 상태이며, 자녀들 역시 모두 훌륭하게 성장시킨 뒤다. 이분들의 귀농은 스스로의 결정보다 타인에 의한 본보기와 영향이 컸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와 자수성가한 끝에 이들보다 앞서 귀농하여 완전히 터를 잡은 또 다른 지인이 함께 살자며 부추긴 덕분에 그들의 뒤를 쫓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귀농한 곳은 행정구역상으로 군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이번에 새롭게 지어진 아파트를 분양 받아 시설 면에서는 정말로 남 부러울 것 하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여건이었다. 부근에서 최고의 아파트라 불리는 곳이다. 환경도 더없이 좋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고, 공기가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데다가 주변으로는 넓다란 공원과 산책로 그리고 운동시설 등이 잘 구비되어 있다. 성장 배경에 비춰 전혀 생뚱맞은 곳이 아닌 고향인 데다가, 주거 여건 역시 최상인 덕분에 먼저 터를 잡아 살던 지인과 이분들이 함께 재미있게 살고 있으리라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의외였다. 이분들은 현재 외딴섬이나 감옥에 가두어진 채 살아가는 느낌이라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의 분위기로 봐선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올 것만 같다. 연세도 많으신 편이라 공기 좋은 시골, 그것도 고향에서의 생활이 훨씬 좋으리라 짐작돼왔던 통념이 여지없이 깨진 경우다. 서울 생활이 너무도 그리운 눈치다. 이분들의 표현을 직접 빌리자면, 지하철만 타면 서울 구석구석 원하는 곳을 마음껏 누비며 마음 편히 다닐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갈 곳이 딱히 없더란다. 손바닥마냥 좁아 한 바퀴 휙 둘러보면 더 이상 다녀올 곳이 마땅찮아 자연스레 집안에서 우두커니 보내는 시간이 태반이라는 얘기다. 일견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되는 터라 감옥이라는 표현을 전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물론 이분들의 경우 과거 서울 생활을 할 때 사업을 직접 벌이는 등 활동성이 워낙 뛰어난 편이라 정적이며 느긋한 환경이 유난히 힘들게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기에 제아무리 좋은 시설 속에서 살아간다 한들 얼마 지나지 않아 몸과 마음이 그에 익숙해지며 별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게 보편적이다. 마찬가지로 뼛속까지 도시사람이라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에서의 삶이 곧 몸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원치 않거나 의도치 않은 환경 속으로 여생을 던져버리기에는 한 번뿐인 우리의 삶이 너무도 짧고 귀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 상상하던 생활과 현실에서의 삶의 간극이 너무 크게 벌어진다면 이는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하지 않을까? 생체리듬이 도시 생활에 최적화되어 있다면, 친구가 강남 간다고 하여 굳이 이를 좇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차라리 현재 환경에 약간의 변화를 꾀해 보는 시도는 어떨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분들의 하소연을 단순히 흘려버려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까 인터넷 등 미디어 매체 역시 비슷한 이유로 귀농 귀촌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향해 경각심을 일깨우곤 하나 역시 이를 직접 경험해 보신 분, 특히 사회 경험이 많고 연세가 제법 되신 분의 생생한 경험담을 접하고 보니 더욱 실감 나게 와닿는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나의 귀농에 대한 로망을 완전히 접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귀농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귀농의 당위성이 뚜렷하지 않거나 막연한 계획만으로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으며, 보다 궁극적으로는 정말 내가 꿈꾸던 삶, 환경 그리고 가치관이 귀농 귀촌과 정확하게 일치하는가의 여부부터 주도면밀하게 살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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