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정녕 여성의 적은 여성인가

새 날 2016. 4. 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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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미국보다 앞서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킨 자랑스런 국가 중 한 곳이다. 실제로 이 땅의 여성들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당선과 동시에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적 관행과 온갖 불평등적 요소가 조금이나마 해소되고, 이러한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질이 나아지리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음직하다.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은 여성이 당당하게 능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이라는 공약을 내걸었고, 취임한 뒤로는 미래 여성 인재 10만 명 양성과 여성 일자리 150만 개의 보장을 약속하는 등 여성 대통령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여권 신장과 양성 평등은 오히려 저만치 퇴보한 채 여성이 살아가기에 더욱 끔찍한 세상으로 변모해 가는 와중이다. 객관적인 수치들이 이를 입증한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 2015’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 145개국 중 115위다. 박 대통령 취임 이전인 2012년 108위보다 되레 더 떨어졌다. 특히 여성의 정치적 권한 부문은 86위에서 101위로 한참이나 뒷걸음질 중이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가장 심한 국가로도 꼽힌다. 남녀 임금 격차가 무려 36.7%에 이른다. 이 또한 2012년 36.3%에서 2014년 36.7%로 더욱 악화된 결과다.

 

ⓒ경향신문

 

공공 부문이나 민간 영역 구분 없이 여성의 사회 진출은 거의 바닥 수준에 가깝다.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6.3%로 191개국 중 111위에 그친다. 여자대학을 제외한 전국 191개 대학 중 총장이 여성인 대학은 단 10여 곳 뿐, 전체의 5.2%에 불과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년간 임명한 여성 장관은 여성가족부 장관 3명을 제외하면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유일하다. 

 

ⓒ경향신문

 

이런 뜨악한 현실을 두고 우리는 과연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중이 제 머리 못깎는다는 표현이 맞다고 봐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흔한 말로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표현이 결코 허황된 소리가 아님을 입증하는 결과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런데 여성 대통령 시대와는 걸맞지 않은 우리의 처지도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긴 하지만, 단순히 우스갯소리이겠거니 싶거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오던 '여성의 적은 여성'이란 말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하는 사례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꾸만 불거지고 있어 솔직히 당혹스럽다. 

 

국민의당 전남 합동유세 과정에서 “여자의 치마와 연설은 짧을수록 좋다”라는 성희롱적 발언이 한 사회자로부터 튀어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발언 당사자는 여성이었다. 이윤자 전 광주정무부시장이 지난 2일 목포 평화광장에서 열린 집중유세에서 사회를 보던 중 불거진 사안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윤자 씨는 광주의 대표적인 여성계 인사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광주 YWCA 이사와 광주시의원, 푸른광주21협의회 공동의장, 광주비엔날레 사무총장, 광주여성재단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광역시부시장에 올라 기네스북 한국판에 등재되기도 했던 이력의 소유자다. 

 

 

여성이, 그것도 여성계의 대표격인 인물이, 같은 여성을 희롱하고 나선 셈이니, 당황스럽지 않다면 외려 그게 더 이상할 정도다. 만약 남성이 똑같은 상황에서 동일한 발언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장 성희롱의 명목으로 경찰에 고발 조치될 테고, 현재의 직위에서 물러나야 할 만큼 민감하면서도 파급력이 높은 사안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평소 남성들의 성차별적 관행에 대해 이를 바꿔야 한다며 줄기차게 주장해 오던 여성 스스로가, 그것도 여성계의 리더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이, 백주대낮에 가득 모인 군중 앞에서 여성 전체를 희롱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공개석상에서 이러한 발언이 여과 없이 튀어나온다는 건, 그녀의 여성관에 대한 평소 지론이 어떠한 것일지를 충분히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공개적이며 공식적인 행사에서도 이 정도이거늘 사적인 자리에서라면 평소 어떻게 행동하며 발언하고 다녔을지 보지 않고서도 뻔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여성계의 리더 입에서 나온 발언 치고는 그야말로 저렴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같은 여성의 입장이기에 더욱 낯뜨겁고 수치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의당이 향후 과연 얼마나 국민을 위한 참된 정치를 선보이며 자신들의 이름값을 톡톡히 해낼지 나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가 최근 안철수 대표를 감싸며 비행기 태우고 있는 사실과 이른바 성누리당으로 불릴 만큼 성추문이 끊이지 않던 새누리당의 정체성이 국민의당의 그것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양상을 보니, 이 대목만으로도 실은 국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하기에는 왠지 벌써부터 거리감이 느껴지게 한다.

 

ⓒ국민일보

 

박근혜 대통령 이름 앞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는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여성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이 땅의 여성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길 바랐으나 현실은 되레 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은 결코 옳을 수 없으며 그리 되어선 아니 된다. 기득권을 움켜쥐고 있는 남성들이 만들어냈을 법한 말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시대에 우리가 받아든 양성 균형 발전 관련 성적표는 이른바 낙제 수준에 가깝다.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스스로의 권리를 찾으려는 노력은커녕 성희롱과 차별을 일삼지 말라며 남성들에게 연신 옐로카드를 꺼내들기 바빴던 여성들이 외려 스스로를 직접 폄하하며 희롱에 나서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여성이기에 반드시 여성 편에 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뒷걸음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는 못할 망정 아픈 곳을 되레 후벼파서야 되겠는가. 여성 리더가 여성 전체를 성희롱하는 결코 웃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여성들이 과연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남성들에게 이는 허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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