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문화가 있는 날, 정작 문화가 없다?

새 날 2016. 3. 3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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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월의 마지막 주 수요일, 정부가 지정한 '문화가 있는 날'이다. 이는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내세워온 4대 국정기조 중 하나인 문화 융성의 대표 정책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융성위원회와 함께 지난 2014년 1월부터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이를 시행하고 있다. 때문에 매월 이날이 되면 전국의 영화관과 공연장, 미술관 등 주요 문화시설을 누구나 무료 또는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밖에 프로야구 등의 스포츠 시설과 박물관, 문화재, 미술관, 도서관 등에서도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문화 향유 분위기 확산을 위해 정부가 본격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모양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가 있는 날인 오늘 2시간 조기 퇴근제를 실시한다. 물론 처음 시도되는 제도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산하 기관 직원들은 문화가 있는 날, 다른 날보다 퇴근시간을 2시간 앞당겨 오후 4시에 일을 마치고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를 점차 다른 정부 부처와 지자체에도 권장해 나갈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산하기관은 물론이고, 타 부처나 지자체에도 협조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문화가 있는 날 홈페이지 캡쳐

 

국민 모두가 문화를 쉽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의 주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앞장서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선도해 나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울러 평소 여러가지 이유로 문화를 접하기 어려웠을 대중들로 하여금 그 간극을 좁히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하기 위해 멍석을 깔아놓은 채 판을 크게 벌이는 행위 역시 매우 바람직스럽게 와닿는다. 이쯤되면 적어도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면 주변 눈치 볼 것 없이 떳떳하게 조기 퇴근이 가능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공무원들이 마냥 부러울 법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의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문제점 하나가 놓여있다. 다름아닌 조기 퇴근 후 문화를 즐기는 행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그러니까 문화가 있는 날에 2시간 일찍 퇴근하는 공무원들은 조기 퇴근하는 대신, 여타의 다른 날 가운데 이틀 동안을 평소보다 1시간씩 일찍 출근하거나, 총 네 차례의 조기 퇴근을 한 뒤 이를 하루 연차로 대체하여 문화가 있는 날 조기 퇴근했던 두 시간 만큼의 분량을 반드시 채워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쯤되면 부러웠던 상황이 반전될 법하지 않은가? 문화 융성이라는 거창한 구호 뒤엔 이렇듯 개개인의 희생이 전제로 깔려있으니 말이다. 굳이 원하지 않던 문화를 억지로 즐기고, 그 뒷감당을 오롯이 개인들이 모두 떠안아야 하는 형국이다.

 

 

짐작컨대 정부가 각종 캠페인성 정책을 펼칠 때면 늘 그래왔듯, 오늘부터 실시되는 조기퇴근제를 활성화한답시고 장관부터 솔선수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휘하 직원들이야 상사가 움직이니 싫든 좋든 개인의 생각 내지 의지와는 별개로, 무조건 이를 따라야 할 공산이 크다. 문제는 이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자발적일 경우와 수동적일 경우 그 일의 성과는 물론, 과정에서 큰 차이를 느끼곤 한다. 하물며 일도 그러할진대 문화를 즐기는 행위야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테다. 스스로 원해서 즐기는 경우와 등 떠밀려 억지로 하게 되는 경우, 그로부터 누리는 감흥은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다. 문화가 또 다른 일의 연장으로 다가오는 순간, 해당 시점부터 문화는 되레 피하고 싶은 끔찍한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그런데 현재 정부가 하는 일이 딱 그짝이다. 문화가 있는 날, 오히려 문화가 없는 셈이다.

 

더구나 문화를 즐기는 일이란 인간의 욕구 가운데 가장 상단에 놓일 법한 행위임이 분명하다. 즉, 먹고사니즘 따위의 아주 기본적인 욕구가 모두 충족되고, 시간적 여유마저 허락되어야 하는 등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체부 소속 공무원들이 처한 상황은 어느 조직이건 마찬가지이듯 개인마다 모두 제각각일 테다. 어떤 이는 밀린 업무에 치여 매일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할 테고, 또 다른 이는 문화를 억지로 즐기는 일 때문에 다른 날 일찍 출근해야 하거나 연차로 대체하는 일이 매우 못마땅하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또 어떤 이는 정부가 강제로 시간을 허락해 주긴 하였으나 심적으로 문화를 즐길 여력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에게 문화를 강권한다면, 마치 울고 싶은 심정인데 웃어야 하는 상황과 진배없지 않을까?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를 융성하겠다고 나선 담당 부처가 오히려 문화 상품만이 지니고 있을 법한 독특한 자유로움과 감성을 무시한 채 그들만의 강제된 틀과 형식을 강요하며 직원들에게 고통을 전가시킨다면, 제아무리 문화 융성이라는 궁극의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이는 결코 바람직스러운 결과물이라고 볼 수 없을 테다. 또 다시 성과주의에 빠지고 보여주기식 행정에 매몰된 채 정작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문화란 강제한다고 하여 억지 감흥을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를 온전히 즐기려면 심신을 무장해제시키고 모든 짐을 내려놓거나 풀어헤친 상황이라야만 가능할 테니 말이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도 밀린 업무를 걱정해야 한다거나 다른 날 일찍 출근해야 하는 상황을 염려해야 한다면 영화라는 특유의 문화 콘텐츠로부터 얻을 수 있는 오만가지의 감성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까? 정부는 문화를 억지로 향유하도록 강제하기에 앞서 되레 국민들이 문화를 즐길 만한 토대, 즉 일상 속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여건을 먼저 조성하는 데에 모든 행정력을 집중시켜야 하지 않을까? 멍석을 깔긴 했는데, 깔아놓은 곳이 진흙탕 천지이거나 울퉁불퉁 뾰족돌들로 고르지 못하다면 과연 그곳에서 제대로 된 판이 벌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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