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극한 선택 불러온 이 시대 청년의 절박한 현실

새 날 2016. 1. 1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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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한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 치고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냐만, 이 젊은이의 사연은 다른 경우보다 더욱 씁쓸함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수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온 이른바 공시족이었으나 시험에 번번이 실패했던 모양이다. 비단 같은 경험이 아니더라도 목표로 설정한 시험에서 단 한 차례라도 고배를 마셔본 사람은 그 낙방의 쓰라림이란 게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충분치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할 테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실망감보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죄책감 및 자괴감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지 짐작 가능해진다.

 

특히 부모님에 대한 미안한 감정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이 압박감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지난해 1월 충남지역의 한 지자체 공무원으로 임용됐다고 가족을 속인 채 거짓 출근을 시작했다. 비극의 서막이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없던 그는 좀 더 완벽한 속임수를 위해 돈이 필요했고, 결국 사채업자로부터 2000만원이란 돈을 빌려 월급을 받아온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감쪽 같이 속여 왔다. 그의 속임수는 지난 8일 한 모텔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기까지 1년간 지속됐으며, 그의 시신 옆에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고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뉴스1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항상 조심스럽기만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양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행위 역시 그다지 바람직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그의 죽음 뒤엔 성격 등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과 남들은 결코 알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배경으로 한 몫 하고 있을 테지만,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보자면 결국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그를 죽음이라는 막다른 곳까지 몰고간 게 아닐까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청년들의 취업 절벽 문제는 일개인의 사안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멀리 온 감이 크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이자 구조적인 모순의 집합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과 스펙이 아무리 잘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일례로 100명의 취업 준비생이 지원한 한 회사에서 고작 1명만을 뽑는 구조라면 99명에 이르는 유능한 개인들은 설 자리가 전혀 없는 셈이 되고 만다. 즉, 양질의 일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이를 준비하는 취업 준비생들이 넘쳐나는 구조적인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이상 100명 중 단 한 명만이 축배를 들게 되는 고단하면서도 비합리적인 작금의 취업 전쟁은 절대로 멈출 수가 없다.

 

이렇듯 고용 한파의 직격탄을 맞게 된 청년들은 취업도 하기 전부터 백수로 내몰리기 일쑤이고,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일부 청년들은 아예 일찌감치 대학 진학마저 포기하고 오로지 공무원이 되기 위한 요량으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이에 쏟아부으며 시험 준비에 매달리는 기현상마저 일상이 되어간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최고 일등 신랑감은 공무원이 돼버렸다. 물론 전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제아무리 탄탄하고 안정된 직장이라고 한들, 일정 나이가 되면 비정규직 등 값싸면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젊은 대체 인력을 투입시켜 자신의 자리 보전이 위태로워지기 십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임금피크제로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건 매한가지인 탓이다. 덕분에 모두가 공무원을 꿈꾸는 사회가 되어간다.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공무원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탓할 수만도 없는 실정이다. 젊은이들에게 모두 같은 꿈을 꾸게 만든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탓해야지, 본능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을 탓하는 건 우스운 노릇이기 때문이다.

 

오늘 언론 기사들을 훑다 보니 유독 눈에 밟히는 기사 하나가 있다. '2016년 대한민국 웃음이 사라졌다'는 제하의 기사다. 2016년 1월, 대한민국의 얼굴 얼굴엔 웃음이 모두 사라졌단다. 청년들도, 여성들도, 노인들도, 근로자들도, 경영자들도, 서민들도, 기업들도, 모두 모두 얼굴이 밝지 않단다. 원인은 단순명료하다. 삶의 품질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란다. 수긍이 간다. 이른바 각자도생의 시대라 불리는 지금 이 순간, 실은 기사 내용처럼 어렵지 않은 세대가 우리 주변에 어디 있겠냐만, 그 중에서도 이제 갓 사회로 진출하여 자신의 꿈을 펼치려는 앳된 청년 세대의 어려움은 더욱 크게 와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으며, 심지어 스스로 목숨마저 끊게 하고 있는가?

 

한 매체가 요즘 청년들에게 당신 인생의 전성기는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돌아 온 답변은 그야말로 톡톡 튀는 데다 가관이다. '초등학교 때'란다. 이 기사 내용을 읽는 순간 난 어이없는 답변에 절로 '풋~'하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허망한 웃음도 잠시, 얼마후 더할 나위없는 씁쓸함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감지해야만 했다. 학창시절도 급이 있는 법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단계로 올라갈 수록 우리 아이들 삶의 질은 떨어진다. 

 

ⓒ아시아경제

 

 이는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밝혀졌으며, 얼마전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이른바 행복지수로 볼 때 초등학생이 가장 높은 편이다. 지나친 경쟁속으로 내던져진 우리 아이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나마 힘든 경쟁을 뚫고 들어간 대학, 과거와 같은 낭만은 온 데 간 데 없고, 온통 취업 준비에 바쁜 모습이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학업의 짐이 덜하고, 부모님의 보살핌 덕분에 적어도 먹고사니즘 따위에 대한 걱정을 느낄 겨를이 없는 초등학생 시절이 그리운 건 인지상정 아닐까?

 

앞서 언급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년은 1년 동안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인들을 안심시켜 온 대가로 스스로의 삶을 갉아 먹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채로 빌린 돈이 모두 떨어지는 순간, 그의 모든 삶이 사라지는 때라고 짐짓 선을 그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뜻 지극히 개인적인 인정 욕구 때문에 이렇듯 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벌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몬 건 너무도 냉혹하여 일말의 동정심조차 사치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 다수의 청년들을 극한 절벽으로 떠밀고 있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모순이 아닐까? 그 역시 죽는 순간, 가장 행복했으며 인생의 전성기라 할 만한 초등학생 시기를 떠올리고 있었던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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