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국정원 직원 공동성명, 왜 부적절한가

새 날 2015. 7. 2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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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불법 해킹 의혹 파문이 현직 국정원 직원의 자살과 직원 일동의 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지며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번 사건을 음모론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의혹 투성이일 수밖에 없을 만큼 복잡 미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이번 정부가 들어선 이래 정치적으로 미묘한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비슷한 사례가 반복돼 온 탓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유능한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제아무리 국가 안보를 다루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았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사람 목숨보다 소중한 건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숨진 국정원 직원은 내국인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유서를 통해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관련 자료를 삭제하였다고도 하였습니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실제로 내국인 사찰이 없었다면 관련 자료를 굳이 삭제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게 보편 타당하면서도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외부 파장보다 국정원의 위상과 대테러, 대북 공작활동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우려되어 자료를 삭제하였다는 그의 주장은 오히려 더욱 커다란 의구심만을 남긴 셈이 돼버렸습니다.  그의 석연치 않은 죽음과 행동은 작금의 의혹을 더욱 중폭시키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한편 국정원이 19일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로 ‘동료 직원을 보내며’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통해 이탈리아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관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원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국정원이 이러한 형태의 보도자료를 낸 것은 이번이 사상 처음있는 일이라 무척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일례로 우리의 국정원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미국 CIA가 'CIA 직원 일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한다면 왠지 그 모양새가 어색하게 받아들여질 듯싶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정보기관 요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에 급급한데, 이번 국정원의 성명 발표가 이러한 편견을 깨도록 만들었기에 상당히 이례적인 데다 창의적으로 다가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조차도 창조경제의 후광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숨진 동료를 앞에 둔 국정원 직원들의 심정은 백번 이해할 만합니다만, 성명서의 내용과 형식이 과연 타당했는가에 대해선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할 사안으로 여겨집니다.  국정원은 성명서를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같은 프로그램을 35개국 97개 기관이 구입하였고, 이들 기관들은 모두 '노코멘트'로 대응한 채 아무런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하며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하기 위해 매일 근거없는 의혹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 오히려 국민에게 푸념하는 행태로 와닿는 순간입니다.

 

그러면서 일부 정치인들은 이런 내용을 모두 공개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근거없는 의혹을 입증하기 위해 국정원이 더 이상 정보기관이기를 포기하라는 요구와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사이버 작전은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매우 민감한 작업으로, 안보 목적으로 수행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노출되면 외교 문제로도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기에 국가안보를 지키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대상으로만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지나치게 자신들이 매도 당하고 있다며 여론 몰이를 통해 의혹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읽힙니다.

 

ⓒMBN 방송화면 캡쳐

 

성명서에선 일부 정치인들이라며 에둘러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이번 해킹 의혹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으며 이를 소상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터라 실은 국민 전체의 요구에 대해 억지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으며, 그 때문에 억울하게 한 사람만 희생됐노라고 하소연하고 있는 꼴입니다.  국정원을 나쁜 기관이라며 일부러 매도하려는 국민은 단언컨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정보기관의 필요성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동안 국정원 스스로 자신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일삼아 왔던 사실을 애써 지우려는 일환에서 이러한 읍소가 시도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대목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는 듯 보입니다.  국정원은 지난 대선 당시 정치 및 선거 개입 활동으로 물의를 빚어 이미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간첩조작사건 역시 이에 한 몫 단단히 거든 바 있습니다.  이후 국정원장을 교체하고 환골탈태하겠노라며 개혁을 부르짖었던 당사자들이 다름아닌 국정원입니다.  이번 해킹 프로그램 구입 시점은 이미 알려졌다시피 2012년 대선과 총선 즈음에 집중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국정원은 구입만 했지 실제로 사용은 하지 않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를 믿는 국민은 아마도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댓글 공작을 통해 정치와 선거에 개입해 왔듯 해킹 프로그램을 이용해 민간인 사찰이 행해지지 않았노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정황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탓입니다.  혹여 자신의 핸드폰에도 해당 해킹 프로그램이 깔린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국민들은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을 불식시켜야 하는 당사자는 당연히 국정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양치기소년으로 전락한 국정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국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35개 국가에선 아무 논란 없이 해킹 프로그램 도입을 받아들였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혹여 그들이 진짜로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처럼 선거에 개입하거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을 터이기에 국민들의 신임이 두터운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국가댓글원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우리의 처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한 상황입니다.  아울러 그와는 상관 없이 불법적인 해킹 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의혹을 해명하라는 국민의 정당한 요구가 왜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하는 행위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국가정보기관이 외려 국민을 매도하고 있는 형국 아닐까 싶습니다.

 

국가안보, 물론 북한과 적대적 대면 관계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입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초법적 지위가 국정원에 부여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작금의 의혹은 해킹을 통해 내국인에 대한 사찰이 이루어졌느냐의 여부입니다.  국정원 역시 국민이 존재하기에 존재할 수 있는, 국민과 국가를 위한 기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 일동 명의로 이러한 성명서를 발표하는 행태는 마치 국민과 정치권을 향해 입 굳게 다문 채 침묵을 강요하며 겁박하는, 언젠가 보았던 기시감으로 와닿아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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