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난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새 날 2015. 7. 2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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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은데,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온 나라가 여름휴가 때 여행을 다녀오라며 들썩인다.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선 형국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3일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부 각 부처가 '국내여행 가기 운동'을 솔선수범하라"며 주문한 이후 실제로 각 부처마다 '여름휴가 국내 여행 가기'와 '하루 더 가기' 캠페인 따위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물론 정부 부처뿐 아니라 각 기업체에까지 이러한 분위기는 확산 중에 있다. 

 

그런데 이 같은 현상, 왠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걸로 봐선 결코 낯설지가 않다.  지난 해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던 탓이다.  세월호에 이어 메르스라는 복병이 연속으로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으며 빚어지는 현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가뜩이나 수출 외엔 특별히 먹고 살 만한 재료가 없는 데다, 이젠 그마저도 경쟁에서 힘이 부치는 마당에 참 운도 지지리도 없다.  때문에 어떡하든 경기를 부양해 보고자 하는 정부의 다급한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휴가마저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모양새는 영 달갑지 않게 다가온다.

 

삼성카드 CF영상 캡쳐

 

메르스 사태가 빚어지기 훨씬 전인 지난 5월 초에도 내수경기를 진작시킨다며 아이들에게 단기방학이라는 미끼를 던져 주고 여행주간이라는 묘한 스케줄까지 맞춰 여행을 다녀오라고 마구잡이로 등 떠밀기 바빴던 정부다.  그러나 각 가정마다 경제 여건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데다,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마저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제아무리 분위기 띄우고 장관이 직접 국내여행길에 오르는 퍼포먼스를 행사하는 등 무턱대고 밀어붙인다고 해서 일반인들에게 있어 선뜻 여행길에 나서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 웃긴 건 집권여당의 행태다.  지난 6월 17일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김무성 대표는 "여름휴가 국내에서 보내기 캠페인을 벌여야 할 것 같다, 국내경제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새누리당부터 하겠다"라고 말했다.  당 대표가 이렇게 발언했으니 이후 하부 조직들이 기민하게 대응에 나섰으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여름휴가는 우리나라에서' 따위의 플래카드가 전국 각지 구석구석에 나붙었다. 

 

ⓒ오마이뉴스

 

그런데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이러한 플래카드를 도처에 붙여 가며 솔선수범하겠다던 새누리당 경남도당 일부 당직자와 당원협의회 사무국장 등 25명이 최근 베트남 등 단체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밝혀졌다.  국민들에겐 경제를 살려야 하니 국내여행을 가라며 등 떠밀더니 정작 자신들은 그에 아랑곳없이 해외로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정말로 무책임하며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 한 사례만 보더라도 이들이 툭하면 입버릇처럼 떠들어 온 경제를 살리자라는 구호가 헛된 망상에 불과하며, 평소 국민들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해 오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비단 앞에서의 이유와 어려운 경제 능력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의 다수는 여름휴가 때 여행을 원치 않고 있다.  최근 마크로밀엠브레인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성인 남녀 1000명 중 절반 이상인 51.7%가 '여름휴가 때 여행이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한 전문가는, 휴가는 곧 여행이라는 뻔한 공식을 부수고 아무것도 안 하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려는 직장인이 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마크로밀엠브레인

 

그렇다.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해외로 나가는 등 적극적인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도 많지만, 반대로 무위도식을 찾는 이들 역시 늘고 있다는 건 그만큼 먹고 사는 일이 녹록지 않다는 방증이다.  비단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무한경쟁이라는 극한의 생존 조건으로 내몰린 처지에서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하기 일쑤다.  우리나라의 2013년 기준 연간 근로시간은 2163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다.  OECD 평균보다 무려 393시간이나 길며, 노동생산성(GDP/총노동시간) 역시 OECD 국가 중 28위로 최하위권이다.

 

 

이쯤되면 여행이고 뭐고 간에 짧은 휴가 기간만이라도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면서 편히 쉬고 싶다는 사람들의 심정이 백번 천번은 이해될 법한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곳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그리고 집권여당까지 모두가 나서 여름휴가 여행을 강권하는 그러한 세상이다.  공무원들은 솔선수범한다며 저마다 캠페인을 벌이는 등 난리도 아니다.  물론 앞과 뒤가 전혀 다른 새누리당의 우스운 행태를 보고 있자면 실소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노력이 정말로 눈물겨울 만큼 가상해 보이긴 하다.  그러나 사람 심리가 참 거시기한 게 억지로 하라니까 더 하기 싫어지는 그런 묘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난 이번 여름휴가 때엔 국내여행이고 뭐고 간에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아니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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