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손님> 약속을 어기는 자, 그들이 봐야 할 영화

새 날 2015. 7. 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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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6.25전쟁이 끝나고 휴전을 선언한 즈음, 시력이 약하고 이빨은 여기저기 썩은 데다 폐에서마저 이상이 감지돼 연신 기침을 해대는 영남(구승현)과 거리를 떠돌며 피리를 불어 생계를 잇고 있는 그의 아버지 악사(류승룡)는 영남의 병 치료를 위해 서울로 가던 길이다.  어느날 우연히 정체 모를 산골마을로 들어서게 되는데, 여기는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된 덕분에 지도에도 표시돼있지 않을 만큼 외진 곳이다.  그래서 그럴까?  처음 접하는 마을 사람들의 그들 부자를 향한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으며, 경계하는 눈빛이 뚜렷했다.  곧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기라도 하는 걸까? 

 

 

이 마을 전체를 통솔하는 이는 촌장(이성민)이다.  모든 일은 그의 지시와 통제에 의해 이뤄진다.  영남 애비는 이러한 마을 촌장에게 양담배 한 갑을 주며 환심을 산 끝에 마을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한다.  그런데 이곳엔 오래된 골칫거리 하나가 있다.  다름아닌 마을 곳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여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쥐떼 탓이다.  마을에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를 퇴치하려 노력하였건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고양이를 풀어놓았더니 거꾸로 쥐떼의 습격을 받게 되고, 어느덧 고양이마저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칫 배고픈 쥐떼가 사람마저 공격하는 불상사가 우려되는 상황, 때문에 이를 막을 요량으로 쥐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끼니 때마다 고양이 고기를 다듬어 제공해야 할 정도로 사태는 심각한 지경이다. 

 

한편 영남 애비인 악사에겐 놀라운 재주 하나가 있었다.  피리를 불어 동물들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자신의 특기를 이용해 마을의 골칫거리인 쥐떼를 쫓기로 하고, 그 대가로 촌장에게서 소 한 마리에 해당하는 목돈을 받기로 약속한 채 실행에 옮기는데... 

 

 

제아무리 전쟁통이라 해도 이곳은 철저하게 고립된 산골마을인 덕분에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들로부터 자유롭다.  이는 역으로 외부로부터의 시선과 영향이 차단된 탓에 마을 공동체 전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인간 됨됨이나 성향이 마을 사람들의 삶에 있어 그 어떠한 요소보다 중요하게 다가온다는 의미가 될 테다.  전쟁의 참화에 쫓기며 최초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 원래 터전으로 삼고 있던 이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였던 촌장은 그들과의 신의를 저버린 채 오늘에 이르게 된다. 

 

자신에게 불리한 약속 따위는 스스럼 없이 깨버리며 사욕을 챙겨온 촌장이 반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약속에 대해선 때로는 상대의 목숨을 위협할 만큼 잔인하게 이를 지킬 것을 강요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영남 애비인 악사가 촌장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갈 것을 부탁할 때 영남이가 눈독을 들인 채 슬쩍한 연필은 얼마 후 부메랑이 되어 그들 부자에게로 되돌아와 마녀사냥에 양념을 더하게 된다. 

 

 

촌장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마을의 선무당 역할을 맡고 있던 미숙(천우희)은 전쟁통에 엄마를 잃고 아버지의 한쪽 다리마저 못쓰게 된 영남네 가족 이상으로 끔찍한 가족사를 안고 있는 비운의 여인이다.  그녀의 말없는 표정과 눈빛으로부터는 그러한 과거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천우희 씨의 내면 연기는 지난해 '한공주'에서처럼 여전히 빛이 난다.  특히 마녀사냥을 당하는 영남 부자와 마을 사람들 앞에서 마치 진짜 신내림을 받기라도 한듯 '손님이 온다'며 눈이 뒤집어진 채 절규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라 할 만하다.

 

 

폐쇄적인 특수한 환경에서의 마녀사냥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서보다 훨씬 식은 죽 먹기다.  약속을 지킨다는 표현을 흔히 셈을 치른다고 말해오던 촌장은 마을 골칫거리 쥐떼를 내쫓은 영남 애비에게 오히려 갖은 누명을 뒤집어 씌운 채 졸지에 빨갱이로 둔갑시키는 악수를 둔다.  평소 영남 애비를 눈엣가시로 여겨오던 촌장의 아들(이준)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인민재판을 열어 그를 사지로 내모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이거나 객관적인 판단 따위가 들어설 여지는 전혀 없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보아온 행태라 씁쓸하기도 하거니와, 개인과 집단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얼마나 커다란 위해를 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잣대인 듯싶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우리의 전통 토속신앙과 '피리부는 사나이'라는 서양 전설의 결합은 꽤나 흥미로운 요소로 다가오며, 덕분에 전혀 새로운 장르 및 형태의 작품으로 탄생한 듯싶다.  이 영화는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기 일쑤인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정치인들이 반드시 관람했으면 하는 작품이다.  약속을 어기는 자에겐 반드시 '손님'이 닥치리니... 

 

 

감독  김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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