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독창적이며 인간적인, 따뜻한 영화

새 날 2015. 7. 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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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 전략 방어 시스템인 '스카이넷'이 스스로의 지능을 갖춘 채 인류를 핵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 넣으며 30억이 넘는 인류를 몰살시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일이지만, 그나마 살아남은 인간들은 기계의 지배를 받으며 쥐새끼처럼 숨죽인 채 살아가야 하는 척박한 환경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법, 비상한 지휘력과 작전 능력으로 인간을 이끌며 끊임없이 기계들을 물리쳐 온 존 코너(제이슨 클락)는 스카이넷 타도를 위한 지하조직을 구성, 기계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반전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스카이넷의 심장부를 향해 회심의 일격을 가하던 2029년의 어느날, 스카이넷은 존 코너의 탄생 자체를 막을 요량으로 타임머신에 터미네이터를 태운 채 그를 1984년의 LA로 보낸다.  이에 대응하고자 존 코너 역시 자신을 충실히 따르던 카일 리스(제이 코트니)를 스카이넷과 마찬가지로 타임머신에 태워 그 뒤를 쫓게 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액션 장면은 그다지 큰 감흥이 없다.  그냥 어벤져스2나 분노의 질주 등을 통해 흔히 보던 그렇고 그런 장면들이 다수다.  마치 오래된 기억을 문득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들 듯, 예전 터미네이터 작품 속에서 등장하던 익숙한 장면들이 오히려 더 반갑게 다가오던 터다.  아울러 노회한 아놀드슈왈제네거가 1편과 2편 등 과거와 미래의 타임라인을 마구 헤집고 다니며 과거 작품 속 장면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가 내겐 더 인상 깊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번 작품은 액션 영화라기보다 타임슬립 류에 더 가까운 듯싶다.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다름아닌 터미네이터의 발전사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놀드슈왈제네거에 해당하는 원조 모델 T-800에서부터 2편을 통해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이번엔 이병헌이 분한, 액체금속으로 만들어져 직접적인 접촉만으로도 모든 형태의 물질로 변형이 가능한 T-1000, 그리고 나노 입자로 이뤄져 변형이 자유로운 데다 제거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T-3000까지, 터미네이터의 변천 과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못 흥미롭다.

 

 

어벤져스2가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촬영과 한국 배우 수현 덕분에 유독 관심을 끌었 듯, 터미네이터 역시 배우 이병헌의 출연 이슈 탓에 눈여겨 보게 된다.  그는 영화 초반 비교적 짧게 출연하고 있지만, 터미네이터2에서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사이보그 T-1000의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낸다.  신기하게도 그의 외모는 해당 역할에 찰떡궁합이었다.  단 한 마디의 대사만 읊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이미지는 그 어떤 인물보다 강렬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출연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인상 깊게 다가온 부분은 다름아닌 터미네이터가 사이보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피부처럼 노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터미네이터 1편이 등장한 지 벌써 31년이란 세월의 흐름이 있었다.  한 세대가 바뀐 셈이자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을 정도로 길다면 꽤나 긴 시간이다.  워낙 근육질의 단단한 몸매와 강인한 인상 덕분에 언제나 한결 같으리라 생각했던 아놀드슈왈제네거 역시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지는 못했던 듯싶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갈 때마다 그의 외모는 뚜렷한 변화를 겪고 있었으며, 하얘진 머리카락과 주름이 잔뜩 패인 최근의 얼굴엔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카일 리스가 노회한 터미네이터를 보며, 기계가 어떻게 사람처럼 늙을 수 있는 건지 의아해 하자 원조 터미네이터 사이보그의 한계인 피부 세포가 노화하기 때문이라는 사라 코너의 짧은 설명이 덧붙여진다.  이 같은 설정은 30년 전 터미네이터로 분장했던 아놀드슈왈제네거를 이번 작품에 출연시키기 위한 영화 제작진의 배려이자 고육지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러한 선입견 내지 편견을 걷어낸 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본다면 금속 기계 덩어리 사이보그의 피부가 동물처럼 노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껏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존의 고정관념의 틀을 확 깨버린, 꽤나 독창적인 발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가 없다.

 

'위플래쉬'에서 괴팍한 스승 역을 맡았던 JK 시몬스도 등장한다

 

아울러 내게도 분명 과거 젊고 단단했던 아놀드슈왈제네거의 터미네이터를 관람하며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한 세대가 훌쩍 흘렀다.  당시에 비해 정확히 한 세대만큼의 나이를 더 먹은 셈이다.  의식적으로 흰 이빨을 내놓은 채 자꾸만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려 애쓰면서 사이보그답지 않게 썰렁한 모습을 통해 관객들에게 웃음마저 선사하려 했던, 깊게 패인 주름들로 가득한 아놀드슈왈제네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덧 내겐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전해져 온다.  동 시대를 살아가면서 배우와 관객이 함께 늙어간다는 사실,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탓이다.  때문에 주변은 온통 차가운 사이보그 기계 천지임에도 불구하고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이 영화, 충분히 독창적이면서 인간적인, 무척이나 따뜻한 영화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감독  앨런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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