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와인집에서 두런두런,『와인집을 가다』

새 날 2012. 9. 1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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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박미향
펴낸곳 : (주)넥서스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아, 집에서 보관 중이던 와인 한 병을 얼마전 개봉했다. 물론 마시기 위함이다. 와인의 '와'자도 모르는 촌스런 녀석이 와인의 이름이나 만들어진 나라 따위에 관심 있을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와인이랍시고 최대한 이쁜 잔을 준비해, 다른 이들처럼 살짝 따라 입에 머금... 이 아니라 일반 술처럼 그냥 벌컥 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이제껏 접해 왔던 와인들에 비해 유독 밍밍하며 텁텁하고... 이리 맛없는 것을 왜 마실까 싶었다.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남은 와인은 다시 봉인... 이 책을 만나게 된 건 온전히, 이렇듯 특별히 더 맛이 없었던 와인 한 잔 때문이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이런 류의 책들엔 조금의 관심도 없었던 터다. 읽어야 할 책들은 많은데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음식 나부랑이 따위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읽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더 없이 맛없는 와인 때문에 호기심에 끌려 손에 들린 책이고, 순전히 와인을 화두로 한 내용이지만, 찬찬히 읽다 보니 와인과 관련된 얘기들도 결국은 우리들 사람 사는 이야기와 자연스레 통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미 이 책 이전에도 음식 관련 도서를 여러 권 출간한 이력이 있는 베테랑이다. 그래서 그럴까. 자칫 단순할 수 있는 소재 와인을 매개로, 매우 다양한 세상과 사람, 그리고 삶의 이야기꺼리들을 맛깔스레 버무렸다.

 

책에 소개된 와인집 주인들의 사연을 읽다 보면,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 음악, 그림, 사진과 같은 예술 쪽으로 조예가 깊거나 전문직으로 일해오던 분들이 다수라는 점이다. 와인이라는 녀석은, 어찌 보면 지극히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작업에 영감을 더욱 깊이 불어 넣어주는,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 주는가 보다. 그들의 도전적인 삶과 와인에 대한 열정은, 나의 안일한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해 주었고, 이들이 운영하는 와인집들은, 때로는 편한 침대마냥, 혹은 외국에서 머무는 듯 이국적인 느낌으로, 또는 마냥 소박하고 따스한 분위기로 가게를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와인집마다 주인장의 취향과 추구하는 패턴에 따라 분위기는 모두 달라진다.

 

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사운드, 다섯손가락의 리드보컬 이두헌의 변신 대목이 특히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건, 순전히 학창시절 열심히 따라 불렀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과 '새벽기차'란 노래 때문이다. 한때 성공 가도를 달렸던 가수가 와인에 도취되어 이를 좇다 결국 '피노'라는 와인집까지 차린 스토리는 자못 흥미로웠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존중, 그리고 돈과 명예에 좌우되지 않는 건강한 자신감을 의미하는 자존감, 이것이 강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에 대해선 지극히 관대한 입장을 취한단다. 한 와인집 주인장의 강한 자존감을 언급할 땐. 내 자신에 대한 자존감에 대해 되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나는?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산타클로스, 이분은 사실 아이들을 마냥 좋아하는 성인(聖人)이다. 하지만 1930년대 코카콜라 사장 로버트 우드러프가 불황을 극복하고자, 한 미술작가에게 의뢰했던 광고 일러스트에서 뚱뚱한 산타클로스로 표현되었고, 이후부터 산타클로스 하면 굴뚝 통과도 힘들 정도의 뚱뚱한 할아버지로 둔갑시키게 되었다는 일화는 무척 재밌게 느껴진다.

 

와인을 생각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이 낭만, 유유자적 등의 이미지이지만, 사실 와인 시장도 자본주의 하의 여느 시장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살벌한 곳이기도 하다. 건축가들의 고뇌와 감성이 담긴, 고급스런 내장재와 시설들로 꾸며진 와인집, 때문에 이는 막연히 부유한 이들이나 운영한다는 선입견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와인집도 엄연히 부침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생존경쟁 현장이다. 어느 와인집 주인장의 바램처럼 몇 년 아니 몇 십년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지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 하는 바램이 어쩌면 괜한 엄살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화려한 도심의 멋진 인테리어를 갖춘 와인집보다, 담백하고 소박한 형태의, 조용한 외곽에 위치한 와인집이 괜시리 더 끌린다.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책에서 소개되어진 부암동의 모 와인집과 같은 분위기의 가게에 앉아, 친근하며 푸근할 것만 같은 저자와 함께 두런 두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나처럼 와인에 대해 완전 문외한인 사람이 읽어도 마냥 즐겁고, 와인 맛집 순례를 계획했거나 실행 중인 분들에겐 당연히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될 듯싶다.

 

와인은 슬픈 사람을 기쁘게 하고, 오래된 것을 새롭게 하고, 싱싱한 영감을 주며, 일의 피곤함을 잊게 만든다. by 바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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