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평범함이 곧 비범함..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새 날 2022. 1. 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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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 유부녀 스즈메(우에노 주리)의 일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애완용 거북이에 사료를 주는 등 하루의 일과를 특별한 의미 없이 소일하는 중이다. 그래서 그럴까. 최근에는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느낌이다. 어디를 가든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기 일쑤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오가던 길을 걷던 도중 스파이를 모집한다는 기상천외한 광고를 발견하게 되는 스즈메. 가뜩이나 의기소침해 있던 그녀에게 이번 광고는 어쩐지 구미가 당겨 온다.

 

광고에 적힌 연락처로 무작정 통화부터 시도해보는 스즈메. 상대는 의외로 쿨한 반응이다. 그렇게 하여 면접이 성사됐다. 그녀가 방문한 면접 장소는 기대와는 크게 달랐다. 스파이가 활동하는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협소하고 평범했다. 시즈오(이와마츠 료)와 에츠코(후세 에리) 부부가 그녀를 반겼고, 대뜸 활동 자금이라며 뭉칫돈부터 그녀에게 건넨 뒤 자신들과 함께 활동하자며 제안해 온다.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지극히 평범한 한 유부녀에 관한 이야기다. 시종일관 유쾌하게 그려진 코믹물이디. 그렇다고 하여 막 웃기지는 않는다. 다만, B급 감성의 유머 코드 덕분에 어느 순간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나름의 묘미는 있다. 평범하다 못 해 어중간하게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이야기에는 평범함이 곧 비범함이라는 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스파이 부부의 면면을 봐도 그렇고, 주변 어디를 살펴 봐도 스파이와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어 보이는 열악한 환경. 그런데 스즈메를 더욱 의아하게 했던 건 그녀가 스파이로 낙점된 이유였다. 그녀가 너무도 평범해서 타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 때문이란다. 스즈메는 부부의 행태가 왠지 의뭉스러웠으나 활동 자금을 현금으로 건네 받은 데다가 그렇다고 하여 달리 할 일도 딱히 없고 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이렇듯 엉겁결에 스파이가 된 스즈메. 하지만 스파이로 성장하는 길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그녀는 짙은 색의 선글라스를 걸친 멋진 외관의 스파이를 상상하고 동경해 왔으나 현실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지금보다 더욱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상부의 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너무도 평범하게 살아온 덕분에 최근 자신의 존재감마저 희미해져가던 찰나 스파이로 변모한 스즈메는 지령으로 떨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늘 행해 오던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를테면 마트에 가서 얼마를 써야 하며, 또한 어떤 제품들을 구입해야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최대한 평범하게 보이는지를 헤아리고 실천하는 일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스파이로 암약(?) 중인 라멘 가게 주인 역시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감춰둔 채 늘 어중간한 맛의 라멘만을 조리해 왔다. 이 어중간한 맛의 라멘은 어중간한 숫자의 손님을 불러 모았고, 또 어중간한 평가를 받으면서 라멘 시장에서 늘 어중간한 지위를 유지해 왔다. 덕분에 그가 스파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어중간한 맛의 라멘을 조리하는 일이 그만의 특별한 레시피로 맛있는 라멘을 만드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그는 항변한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스즈메와는 달리 비범했던 절친 쿠자쿠(아오이 유우). 그녀는 스즈메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그녀의 비범함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스즈메라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일들을 그녀는 무리 없이 척척 해냈다. 그러나 삶의 색깔은 이를 살아가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달리 채색되는 법. 비범함이 반드시 평범함의 상대적 우위에 놓인 가치라고는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영화는 스즈메와 쿠자쿠의 대비되는 삶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웅변한다.  

 

 

 

사람들 무리 속에서 어중간하게 살아간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띌 듯 말 듯 다른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아주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의 삶에서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빠르게 헤엄친다>는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고 실천하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 쉽지 않고, 때문에 이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누구보다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하찮다고 가볍게 여겨지는 것들이 어쩌면 진정 소중할지도 모른다는, 일상 속 평범함이야말로 가장 비범한 가치라는 아주 단순한 이치를 일깨운다.

 

영화는 오늘도 지극히 평범하고 어중간한 이 어려운 일을 기어코 해낸 당신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감독  미키 사토시

 

* 이미지 출처 : (주)엔케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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