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취약계층의 삶을 짓밟는 좀비 채권

새 날 2020. 2. 3.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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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는 우리 경제의 가장 취약한 고리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가구당 부채는 평균 8천만 원에 육박했다. 전체 가계부채와 자영업 대출을 합산할 경우 2천조 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래서일까? 일각에서는 이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가족이 극단 선택을 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 뒤에는 생활고와 채무 부담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복지제도가 비교적 잘 갖춰져 있고, 개인회생이나 파산 제도도 운영되고 있는데 왜 이러한 비극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걸까? 지난 1일 방송된 SBS <뉴스토리> ‘평생 족쇄 좀비 채권을 아십니까?’ 편에서는 빚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현실과 그로 인한 문제점 그리고 해결책에 대해 짚어봤다.


환갑이 넘은 유모 씨는 20년 전 전원주택사업에 뛰어들었다가 큰 빚을 떠안게 됐다. 노숙생활을 전전하던 그는 최근 한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살림터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30억 원의 은행대출과 사채 빚 가운데 29억 원을 갚았으나 1억 원은 여전히 빚이다. 거센 빚 독촉에 시달리다 결국 소중한 가족의 곁을 떠난 유모씨, 워크아웃을 신청하고 막노동으로 남은 빚을 차근차근 갚아나가는 와중이다. 그는 “오죽했으면 가정과 자식 다 버리고 노숙생활을 택했겠나. 빚 독촉이란 게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빚은 단란했던 한 가정을 파괴하고 삶의 의지마저 꺾는다. 



73세의 홍모 씨. 그가 빚 독촉을 피해 가족과 헤어진 뒤 한 평도 채 안 되는 쪽방에서 생활해온 지 올해로 벌써 17년째다. 20년 전만 해도 비교적 쉽게 발급받을 수 있었던 신용카드, 이것이 그에게 평생 족쇄로 작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장 해결해야 할 생활비와 학비 때문에 여러 장의 카드로 돌려막기에 나섰고, 결국 빚을 떠안게 된 것이다.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집을 뛰쳐나왔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해봤으나 현실은 이자를 갚기조차 버거웠다. 그는 지금 대리운전을 하며 쪽방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한 푼이라도 아끼며 모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된다. 나이 먹은 사람은 들어갈 데도 마땅찮다“ 


심모 씨. 19년 전 친구와 함께 가전제품 대리점을 차렸다가 사업이 망해 빚을 떠안게 됐다. 막노동을 하며 이를 갚아보려 애썼으나, 2천6백만 원에 불과하던 빚이 고율의 이자까지 더해지면서 어느덧 1억 원으로 크게 불어나 어찌해볼 수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빚을 떠안게 된 이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어떻게든 빚을 갚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들이 희망을 품고 노력할수록 되레 빚은 점점 불어나 숨통을 조여오기 일쑤다. 빚이라는 깊은 수렁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처지로 내몰린다. 왜일까? 한번 빠지면 평생을 헤어 나올 수 없게 한다는 빚. 그 이면에는 절대로 죽지 않고 되살아나 채무자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른바 좀비채권이 있었다.


SBS


좀비채권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부실률을 낮춰야 하는 은행은 석 달 넘도록 연체된 채권을 계속해서 보유할 수 없는 형편이다. 싼값에 대부업체 등에 팔아넘긴다. 가령 천만 원짜리 채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부업체는 이를 20%의 가격인 200만 원에 사들인다. 그런 다음 원금인 천만 원에 높은 이자까지 얹어 채무자를 독촉한 뒤 돈을 받아낸다. 이들에겐 단 몇 백만 원만 받아내도 남는 장사다. 더 받아내기 어려울 경우 다른 대부업체에 자신들이 사들인 가격의 20%인 40만 원에 해당 채권을 팔아넘긴다. 이 대부업체는 또 다시 채무자를 독촉, 자신들이 받아낼 수 있는 만큼 돈을 받아낸다. 이런 방식으로 채권을 헐값에 다른 대부업체 등에 떠넘기고 그와 동시에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렇다면 엄연히 소멸시효가 존재하는 채권은 어떤 방식으로 되살아나 몇 십 년에 걸쳐 채무자를 괴롭히게 되는 걸까? 채권은 통상 5년이 지나면 효력이 소멸된다. 하지만 그 전에 대부업체가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할 경우 채무자는 법원으로부터 통지를 받아도 그저 빚 독촉이겠거니 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치 않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로써 채권 시효는 10년이 더 연장된다. 이런 방식으로 죽은 채권이 좀비처럼 자꾸만 되살아나고 여러 대부업체를 떠돌면서 몸집을 부풀려 채무자를 평생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은 “채권 시효가 연장을 거듭하여 결국 수십 년, 심지어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 남겨진 가족들이 자신의 모든 짐을 떠안게 될 것이라는 극도의 공포감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채권자는 투자자이기에 투자했을 때 실패의 책임도 떠안아야 한다. 사적 계약에 있어 한쪽 당사자가 계약 이행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죽음으로 갚아 이행하라’는 사회는 후진 사회”라고 꼬집었다. 


제 의원은 “선진국에서는 죽은 채권을 되살리지 못하게 하고, 부실채권 매각도 엄격히 제한한다”면서 “호주나 영국 등에는 채무를 조정할 수 있는 의무 조항이 있고, 연체될 경우 금융권은 의무적으로 채무 조정 상담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채무를 유예 시키거나 이자를 탕감하고 원금도 일부 조정해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떨까? 우리나라도 뒤늦게 공정채권추심법을 개정한 이른바 ‘죽은 채권 부활 금지 법안’이 20대 국회 들어 발의됐다. 하지만 제대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 4년째 표류 중이다. 



어쩔 수 없이 빚더미를 떠안은 채 삶의 의지마저 꺾인 사람들, 이들로 하여금 빚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도록 돕고 다시금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게 할 묘안은 없는 걸까? 정부와 지자체에는 부채 문제를 상담해주는 여러 기관이 존재한다. 개인회생이나 파산 등의 제도도 마련돼 있다. 일견 잘 갖춰진 듯하다. 하지만 취약계층은 이마저도 정작 제때에, 그리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살림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이 때문이다. ‘성공회살림터’에 들어온 가족 단위의 취약계층은 2년 안에 반드시 자립하여 나가야 한다. 실제로 지난해 입소한 8가족 가운데 7가족이 집과 직업을 마련하여 자립하는 데 성공했다. 성공회살림터 최석진 원장은 “금융, 심리, 교육, 주거, 취업문제까지 종합적으로 지원을 하는데, 이런 식의 지원은 자립률이 굉장히 높다. 90% 이상이 자립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그러니까 성공회살림터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제도와 달리 자립에 필요한 모든 영역의 서비스를 한 곳에서 지원하고, 취약계층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자활의 성공률을 높인 셈이다. 빚과 생활고에 고통 받는 취약계층을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금융과 복지를 일괄 연결한 논스톱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당위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신용이 낮아 고금리 대부업체를 찾게 되는 취약계층, 이들은 빚의 수렁에 빠져 가족이 해체되는 등 삶의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이의 배경엔 죽은 채권이 되살아나 여기저기 팔리며 빚을 떠안은 이들의 삶을 짓밟아온 좀비 채권이 자리한다. 이의 해법은 또 다시 정치권이 쥐고 있다. 이들이 지금처럼 정쟁에만 매몰된 채 직무를 유기한다면, 우리 사회는 죽음으로 갚아 채무를 이행해야 하는 후진 사회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 할 것이다. 잇따른 일가족의 죽음은 이에 대한 경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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