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의 전설

치유와 위안으로 다가오는 초거대 반려견

새 날 2018. 10. 2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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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유독 개를 좋아합니다. 반려견 인구가 천만을 넘어섰노라는 통계가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예뻐서 그럴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으나, 예쁘기로 치자면 개보다 빼어난 동물들이 훨씬 많을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것만으로 작금의 현상을 설명하기엔 조금 부족한 듯싶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얼까요? 사람처럼 배경이나 조건을 저울질하고 상대를 가려가며 대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런지 소녀 옆에 앉아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는 초거대 반려견의 모습으로부터는 왠지 위화감이나 이질감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니 무언가 고민거리를 안고 있을 법한 소녀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바라보는 반려견의 진지한 모습은 어쩐지 소녀뿐 아니라 우리의 고민까지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처럼 넉넉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그림들은 모두 정우재라는 작가분이 그린 것입니다. 현재 반려견을 소재로 한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 것도 않고 그저 그림만 쳐다보았을 뿐인데, 어쩐지 위안으로 다가오는 듯한 이 뭉클함은 비단 저만의 느낌일까요? 정우재 작가가 그린 화폭 속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엿보입니다. 우선 어김 없이 소녀가 등장합니다.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앳된 소녀입니다. 아울러 소녀보다 몸집이 훨씬 큰 초거대 반려견도 함께 등장합니다.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가냘픈 소녀 곁을 지키는 반려견의 든든하면서도 그 선한 눈빛은 소녀에게 시종일관 위로를 건네는 듯 다가오며 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절로 위안을 얻게 됩니다.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릴적 보았던 동화책 '플란다스의 개'가 자연스레 떠오르는데요, 결코 우연은 아니겠지요?



이른바 초연결시대라 불릴 정도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그들과 24시간 365일 항상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휴대폰 앱을 열어 터치 한 번이면 어떤 사람과도 즉각적인 소통이 가능해질 정도로 정말 편리한 세상이긴 합니다. 메신저 앱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친구로 등록되어 있으며, 갖가지 목적으로 개설된 채팅방 숫자만 해도 수십 개가 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 받고 싶어서라도 거의 하루종일, 심지어 잠잘 때조차 휴대폰을 손에서 떼어놓지를 못합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에 휩쓸려 좀처럼 정신줄을 잡지 못하고 흡사 이를 놓쳐버린 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스스로에게 한 번쯤은 던져봤음직한 질문입니다.


'여긴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초연결시대에는 잠시라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경우 초조함을 넘어 불안 증세가 나타나기 십상입니다. 거리를 걸으면서도, 밥먹을 때에도, 친구와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울 때에도 우리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소통을 하고 있길래 이토록 정신을 못차리는 걸까요? 하지만 그 뿐입니다. 수많은 연결은 여전히 우리의 결핍을 메워주지 못합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건네며 위로를 받고 싶은 순간, 막상 그 적임자를 찾기란 쉽지 않은 노릇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관계맺기의 홍수 속을 살아가면서도 정작 외로움과 공허함 때문에 고통을 호소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관계의 대부분이 일종의 계약에 의한 산물인 까닭이지요.



그러나 반려견과의 관계는 사뭇 다릅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주인이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부자건 가난한 자이건, 사회적 지위가 높건 높지 않건, 젊은이이건 노인이건, 인사이더건 아웃사이더건, 예쁘건 못났 건, 깨끗하건 지저분하건 전혀 관계 없습니다. 주인 앞에서는 한결같이 충직하게 행동할 뿐입니다. 사람처럼 이것 저것 조건을 따져가며 견주고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에만 움직이거나 관계를 이어가는 등의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행위는 일절 않습니다. 기망이나 배신 따위도 없습니다. 오늘날 천만이 넘는 인구가 반려견을 기르며 이로부터 위안을 찾고 정서적 결핍을 메우려는 건 다름 아닌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정우재 작가의 작품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그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반려견의 의미와 역할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아주 잘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역시 반려견 주인이기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그는 왜 하필 초거대 반려견을 화폭에 옮겨놓은 것일까요? 그가 밝힌 작품의 의도 일부를 살펴보겠습니다.


거대한 반려견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불안과 문제에 대해 치유와 위안의 길을 열어준다. 현대사회의 경쟁을 통해 생기는 감정적 공허함은 이러한 관계의 중요함을 더욱 상기시킨다. 우리는 반려견 앞에서 자신을 꾸미거나 이해관계를 생각하며 대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강요되는 모습이 아닌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려견은 변하지 않는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의 결핍되어가는 관계와 변해가는 본성과 마주할 수 있게 해주며, 위안을 얻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체구와 귀여운 외향을 지닌 반려견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깊이 사유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작품에서는 훨씬 거대해진 존재로 변화시킴으로써 신뢰와 관계에 대한 상징성을 극대화시키고자 했다.


반려견을 기르고 있거나 유독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우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반려견과 마주칠 때면 왠지 반갑고 즐거운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기르던 녀석을 먼저 떠나보낸 상실감을 겪은 사람들일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거리에서 말라뮤트나 혹은 가까운 친척뻘인 시베리아허스키 류만 만나도 너무 반갑습니다. 녀석들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제가 길렀던 미르와의 추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정우재 작가의 그림은 이러한 측면에서도 제게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아마도 비슷한 감정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제법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결핍을 메워주며, 위로를 건네주는 반려견, 그 크기를 극대화시켜 화폭에 옮겨놓음으로써 모진 세파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반려견의 따스한 존재감을 다시금 부각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정우재 작가 전 'Gleaming, Dear Diary'은 서울 용산에 위치한 '아트스페이스 루'에서 현재 진행 중이며, 11월 5일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입장은 무료입니다.



* 이미지 출처 : YTN 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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