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불안감이 잉태한 파멸의 씨앗 '해빙'

새 날 2017. 3. 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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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승훈(조진웅)은 선배가 운영하는 수도권의 신도시에 위치한 작은 내과 의원에 취업하게 된다. 동네 의원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곳 역시 외래환자의 다수는 건강보험과 연계된 내시경 환자다. 그 때문일까? 직무이기에 묵묵히 몸담고는 있지만, 하루종일 내시경 검사에 시달리던 그는 내심 이러한 현실이 탐탁지 않은 듯보인다. 매일 반복되는 그의 일상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게 할 만큼 지루함의 연속이다. 그는 병원 부근의 정육식당 주인(김대명) 건물 원룸에 나홀로 세들어 살고 있는 처지이다.


한편 병원이 위치한 해당 지역은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사건이 횡행하던 곳이다. 한동안 수면 아래에서 잠자던 살인사건이 최근 또 다시 불거졌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자신이 세들어 살던 원룸 주인의 아버지(신구)가 승훈의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게 된다. 



가수면 상태에서 검사를 받던 이 할아버지의 입에서 무의식 중 살인과 관련한 발언이 흘러나오면서 이를 듣고 있던 승훈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때부터 승훈은 정육식당의 주인과 그의 아버지가 해당 지역에서 자행되어 온 연쇄살인사건과 관련, 깊숙이 연루돼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되는데...



승훈의 어깨가 축 처진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도 한때는 잘 나가던 의사였으나 지금은 빚을 지고 사채업자에게 쫓겨다녀야 할 만큼 경제 사정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진 상황이다. 최악이었다. 아내인 수정(윤세아) 그리고 아이와 헤어지게 된 것도 모두 이러한 연유 탓이다. 그의 모습은 의기소침함 그 자체였으며, 늘 무언가에 쫓기듯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온통 그를 짓누르고 있었으며, 불안감과 강박 관념이 최고조에 달해 있던 찰나다. 



이런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정육식당 부자의 끔찍한 살인 사건과 관련한 심증이 뇌리에 박히자 그는 흡사 공황에 빠지기라도 한 양 더욱 커다란 정신적 혼돈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정육식당의 주인은 유독 승훈에게 만큼은 친절했다.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살가웠다. 물론 그럴수록 승훈에게는 뇌리에 박힌 그들 부자를 둘러싼 환경이나 여러 사건들 그리고 자신의 감정 따위가 한데 뒤섞이면서 이러한 친절이 되레 괴롭기만 하다. 별 의미 없이 툭툭 내뱉는 정육식당 주인의 질문이나 발언 따위도 폐부 깊숙이 와닿으며 이상할 정도로 승훈의 영혼을 뒤흔들어놓기 일쑤다.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는 간호조무사 미연(이청아) 역시 늘 그의 주변을 맴돌면서 의도치 않게 그와 자꾸만 엮이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승훈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물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조경환(송영창)이라 불리는 전직 경찰은 또 어떤가. 승훈의 불안감이 증폭되거나 사건의 변곡점마다 등장, 늘 주변을 맴돌면서 그의 삶에 자꾸만 개입해온다.



영화는 한 블럭만 벗어나면 낙후된 지역으로 둘러싸인 신도시라는 개발 및 성장 그리고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공간적 배경 아래에서, 이렇듯 변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계층 하락 내지 경제적 몰락을 부각시키고,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라는 지역적인 특색, 아울러 내시경 검사와 정육점이 갖는 원초적 느낌 따위를 혼합시키면서 내재되어 있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더불어 얽히고 설킨 온갖 관계들이 이에 덧대어지자 흩어져있던 방향성이 비로소 한 곳을 향해 수렴해가기 시작한다.



내시경을 몸속 깊숙이 투입시켜야 내밀한 속내를 속속들이 알 수 있듯이, 결코 눈치챌 수 없었던 겨우내 물밑의 상황 또한 한강물이 해빙되고 수온이 본격적으로 상승하는 3월과 4월이 되어서야 그 전모가 드러나곤 한다. 사체가 떠오르고 나서야, 즉 모든 상황이 곪아터지고 나서야 그에 따르는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게 되지만, 때는 이미 늦는다.


변승훈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저에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물론 이는 변승훈이라는 영화속 가상 인물에만 국한된 얘기는 결코 아닐 테다. 모든 인간 역시 크든 작든 불안감이라는 요소를 안은 채 살아간다. 적당한 불안감은 마치 백신을 몸속에 투입하듯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유인으로 다가올 공산이 크지만, 과도한 불안감은 방어기제의 이상 작동을 일으키며 자칫 신경증적이거나 병적인 요소로 발전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불안감의 잉태가 개인에 국한된 것이라면 그다지 문제의 소지는 없겠으나, 사회적 병리 현상에 의한 결과물이라면 차원은 전혀 달라진다. 



변승훈은 의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아가던 도중 단 한 차례의 실수로 그 계층으로부터 이탈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영화속 허구로 그치는 사안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 사회는 실수를 용납 않는다. 자본주의의 폭주,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횡행과 동시에 승자독식사회로 치달으며, 소수 계층이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평등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무한경쟁으로 내몰린 사회구성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계층 이탈이라는 불안감을 호소해야 할 판국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기보다 오늘날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현상들이 우리 개인을 어떠한 방식으로 파괴하고 변모시킬 수 있는가를, 추리소설 같은 독특한 심리적인 접근법과 섬세한 연출로 경고하고 나선 셈이다. 



감독  이수연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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